사랑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것
가을은 요즘 바쁘다.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 바람과 무대를 연출하고, 하늘과 협력하여 배경을 장식하고, 태양과 이야기하여 조명을 세팅한다. 무대를 채우는 배우들은 황금빛 은행잎, 붉은 단풍잎, 연잎만 한 크기로 압도하는 플라타너스잎이다. 봄날의 개나리 못지않게 화사한 가을 은행잎은 바람의 손을 잡고 춤추고, 햇빛 조명에 닿은 단풍잎은 석양을 담아내고, 플라타너스잎은 푸른 하늘과 작별 키스를 하고 우수수 내려와 도심을 숲으로 만든다. 이토록 황홀한 가을의 공연 덕에 하루하루가 축제다.
매일이 축제 같을 것 같지만 아쉽게도 즐기지 못하는 날들도 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내 마음이 굳게 닫혀서 어떤 아름다움도 담지 못하고 튕겨낸다. 며칠 전 남편과 다툰 날이 그랬다. 남편과 여느 때처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사소한 말 한마디로 기분이 상해서 말랑하던 분위기가 딱딱하고 차가워졌다. 가볍고 신나던 마음에 불구덩이가 앉은 듯 무겁고 뜨거웠다. 이럴 때 나는 걸으며 움직이는 다리로 무거운 마음을 털어내고, 붉게 달아오른 감정을 바깥공기로 식혀야 한다. 그래서 다툰 후 집 밖으로 나갔다. 가을 쇼가 한창인 거리 위로 고개도 들지 않고 앞만 보며 걸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화산 같이 들끓던 화가 식고 문득 살갗에 닿은 따스한 햇살이 느껴졌다. 그제야 앞만 주시하던 시선을 들어 위를 쳐다보니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가 그친 하늘에 피어난 무지개보다 형형색색인 가을의 선물을 보자마자 위안이 되었다. 눈에 긴장이 풀리고 찌푸린 이마가 느슨해졌다. 다음 날 비소식에 이어 진짜 겨울이 시작될 거라는 일기예보가 떠올랐다. 올 해의 단풍 쇼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오늘이 가을의 피날레겠구나.’ 하마터면 이번 가을 공연의 절정을 즐기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바람과 완벽한 호흡을 자랑하며 빙글빙글 내려오는 단풍잎을 보며 다시 한번 감탄했다. 거리에 깔린 노랗고 빨간 잎들은 꽃밭 같았고, 간들간들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는 세레나데처럼 들렸다. 모든 디테일이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온 세상이 꽃다발처럼 선물이지 않냐고, 모든 소리는 사랑의 속삭임이지 않냐고. 분노에 사로잡혀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불태우지 말라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가을의 가르침에 내 마음도 일렁였다. 이미 봤어도 다시 봐서 좋은, 내일이 되면 보지 못할 거라 더 소중한 오늘의 가을을 볼 수 있어 기뻤다. 어제를 살았어도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삶에 감사하는 마음은 사랑만이 가르쳐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 바빴던 이유는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