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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stas Sep 18. 2023

산토리니의 재발견

42일간의 배낭여행 8. 산토리니

12시간 동안 페리를 타고 새벽 3시 산토리니에 도착했다. 로도스로 갈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큰 배였다. 새벽 도착이기 때문에 애를 재울 수 있는 환경이 필요했고, 미리 다운로드해둔 영화를 보려면 콘센트도 근처에 있어야 했다. 분명 사전조사에서 소파 자리를 선점해야 한다는 선행자들의 글을 읽고 갔는데, 로도스 구시가지를 구경에 시간을 쫓기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난생처음 타보는 큰 배의 구조에 놀라면서 이쪽저쪽 구경하다가 아뿔싸 싶었다. 길게 누울 수 있는 소파형 좌석들은 이미 여행객들이 자리를 잡은 상태.

망했나 싶은 마음으로 돌다 보니 식당칸 옆에 공간이 있었다. 사전정보에서 파악되지 않은 공간이다. 중앙 계단 통로와 가까이 있고, 식당 옆이라 음식냄새 때문에 선호하지 않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딱 좋았다. 중앙계단 옆에 화장실이 있어서, 배탈로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하하에게 딱 좋았고, 일자로 길게 누울 수 있는 소파와 테이블, 그리고 바로 위에 콘센트가 있었다.  


적당한 자리를 잡은 덕에 불편하지 않게 아이를 재울 수 있었지만, 이 배가 산토리니행 배는 아니기 때문에, 내리는 시간을 잘 체크하고 있어야 했다. 방송을 듣고 내릴 채비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해선 안된다. 당연히 나는 뜬눈으로 새벽 3시를 맞이했다. 아직 남아있는 관문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에 긴장한 탓도 있다.

피라마을로 가는 로컬버스가 그 시간에 운행하는지 확인이 안 된 거다. 코로나 전엔 성수기에는 분명 있었던 걸로 확인되는데, 코로나 이후 많은 것들이 바뀌었기 때문에 최신 정보가 필요한데 찾을 수 없었다. 산토리니의 모든 숙소는 새벽 픽업을 하는데 공통적으로 40유로인 듯했다. 숙소 호스트에게 사전에 문의했을 때 버스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며 픽업을 신청하라고 했지만, 버스가 있다면 2유로인데 40유로를 쓰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모험을 한 것이다. 없으면 택시라도 탈 수 있겠지 했다.

새벽 3시에 정기적으로 항구로 들어서는 큰 페리가 있다면, 로컬버스가 없어도 대기하는 택시조차 없을 리야. 긴장하며 배에서 내리자마자 왼편으로 버스 한 대가 불을 밝히며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얏호!


튀르키예 쪽에서 넘어간다면 비행기로 오지 않는 한 새벽배이기 때문에 숙소들도 이에 맞춰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듯했다. 무리 없이 새벽 체크인을 하고, 산토리니의 아침을 맞았다. 하하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배에서 화장실에 다녀온 하하는 변에서 피가 나왔다고 얘기했다. 아이가 보았다고 하는 것이 정말 피였을지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자는 아이 옆에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증상에 대한 검색을 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햄버거병. 거의 뜬눈으로 아침을 맞은 것 같다.


원래는 피라에서 이아까지 트레킹을 할 참이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차를 빌려서 밤 9시 아테네행 비행기 탑승 전까지 섬을 돌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이의 상태 때문에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산토리니까지 왔는데 주변 구경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며, 생수 한 병을 들고 숙소를 나섰다. 나는 쪼리를, 하하는 크록스를 신은 채였다.


피라의 번화한 거리에서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아 방향으로 걷다 보니 점차 멋진 경관들이 눈에 들어왔고, 하하는 괜찮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처음 걸을 때 왼편으로 예쁜 집과 상가들이 있고 오른편으로 길게 바다가 보여서 지도의 방향과 다르니 어리둥절했는데, 섬 자체가 남북으로 긴 모양이었고 양옆으로 바다가 다 보일만큼 동서의 폭은 좁은 섬이었던 거다. 지도만 봐서는 크기 가늠을 못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작거리는 피라 핫플레이스를 지나니까 왼편으로도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좌우로 바다를 두고 기다란 화산섬 길을 걷고 있는 거다! 너무 멋진 길이다 보니 나는 하하가 아픈 걸 잊었고, 하하도 그런 모양이었다. 아마도 단순한 장염이었고 나아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일 게다. 조금만 더 가보고 힘들면 버스 타고 돌아가자, 조금만 더 가보자 하다가 어느덧 지도를 보니 3분의 1은 걸었고, 우리는 그냥 이 섬의 끝까지 걸어 보기로 했다.

중간에 하하가 화장실이 급하다고 하여 아무 카페나 가서 일단 화장실부터 보내고 메뉴판을 보는데 먹을만한 게 없어 그냥 일어서려고 했더니 화장실값 2유로 내라고. 그래서 가장 싼 레몬수를 3유로에 사들고 나왔다. 그리스 최고 휴양지의 인심이니 그럴 만도 하다. 어느 정도 걷다 보면 음식점들도 줄어 띄엄띄엄 있고, 그마저도 끊기는 구간이 나온다. 앞뒤로 길게 섬의 꼬리가 보이며, 화산섬이라 흙은 검고, 양옆은 푸르러 바다와 하늘과 맞닿아 있고, 거기에다가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 이 세상의 길을 걷는 것 같지가 않았다.  신혼여행지로 휴양의 섬으로만 유명했던 산토리니의 재발견이다.


중간에 과일을 파는 노점이 하나 있었고, 더 가서는 간이마켓도 하나 있어 물을 살 수가 있었다. 그렇게 계속 가다 보면 다시 산토리니 특유의 하얀 집들이 드문드문 보이다가 다닥다닥 붙어 많아진다. 이아마을이다.


사실 산토리니를 여정에 포함하면서 숙소 예약이 정말 스트레스였다.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섬답게 눈이 휘둥그레지게 멋진 숙소들이 많았지만, 그런 숙소들은 가격도 눈이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우리가 묵는 와이파이도 잘 안 터지는 에어비앤비 숙소조차 2박 30만 원이 넘을 정도니.

처음 걸으며 그림 같은 숙소들의 프라이빗한 공간에 엎드려 일광욕을 하며 책을 읽거나 맥주를 마시는 여행자들을 보며 부럽게 느껴졌는데, 그 모든 화려한 숙소들을 다 거쳐서 피라에서 이아까지 걷다 보니 그런 생각이 다 사라졌다.


걷는 우리가 가장 멋지고 이 길의 주연이었고, 주변의 화려한 숙소들과 그 숙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멋진 사진기록과 기억을 위한 장식이고 조연이었다.


"근데 우리 떠돌이 모자 같지 않아요?"


그늘에 앉아 잠시 쉬던 중에 하하가 한 말이다. 집 떠난 지 어느덧 20일 가까이 되어가고, 한 숙소에서 2박 이상을 한 적이 없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럴만했다. 둘이 한참을 웃었다. 걷는 길에 도마뱀이 많았는데 하하는 도마뱀 이름을 브라이언즈라고 지어주며 게임을 제안했다. 걷다가 브라이언즈를 먼저 발견하면 1점씩 올라가는 게임이었다. 그렇게 섬의 끝에 도착했고, 세계 3대 석양명소라는 산토니리의 석양을 보러 몰려드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도 자리를 잡고 감자칩과 맥주 한 캔을 놓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다음날에는 숙소에서 짐을 다 챙겨 나와서 렌터카를 빌려 섬을 둘러보기로 했다. 저녁 9시 비행기니까 6시까지만 차를 반납하면 충분했고, 피라 남쪽으로 쉬엄쉬엄 다녀볼 생각이었다. 여기서 이번 여행 두 번째 트러블을 경험한다. (첫 번째는 하하의 장염)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의 경험으로 수동기어 차량을 원했더니,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는 가게 앞 자량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차에 태우고 5분 거리 어떤 집으로 가서 마당에 세워진 차량으로 안내한다. 한눈에 보기에도 낡은 차였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나절 탈거라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 그냥 타고 나왔는데, 채 1분도 안되어 맞닥뜨린 오르막길에서 차가 힘을 전혀 쓰지를 못했다.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는 순간 아무리 겹쳐 액셀을 밟아도 뒤로 밀렸다. 수동 기어차량만 20년째 운전이고 웬만한 경사는 무리 없이 다니는 실력이지만 안 되겠다 싶었다. 산토리니에는 경사길이 많고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다. 그 길로 렌터카 업체로 가서 환불을 요구했는데, 계약상 환불은 안되고 오토 차량으로 바꿔주겠다고 하던 사장은 곧 말을 바꿔서 차량을 반납하면 끝이라며 차량 교환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차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현지인이 문제없이 타고 있는 차량은 맞을 거다. 그렇지만 초행길 관광객이 탈 수 있는 차는 분명 아니었다. 그 차를 업체 앞에서 테스트해 보았다면 빌리지 않았을 텐데, 같은 차를 주겠다고 하며 다른 곳으로 데려간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었지만, 이 긴 사연을 조목조목 사장에서 설명하기엔 내 영어가 짧았고, 현지인과 싸워서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60유로를 깨끗이 포기하고 그곳을 떠났다. 우리는 여행짐을 다 짊어지고 로컬버스를 이용해 산토리나 남부 레드비치로 가 해수욕을 하고 비행기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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