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속 '진짜 서울' 여행(1)
지방 도시에서 자가용이나 버스를 이용해 서울에 오려면 톨게이트를 지나게 된다. 나의 경우는 동서울 톨게이트를 지나 롯데타워가 보이면 집에 다 왔다는 마음에 안도감이 들곤 한다. 조선시대에는 한국인이라면 모두 아는 남대문이 톨게이트였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서울에 들어오려면 성곽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흔히 말하는 '사대문 안'이라는 말은 한양도성 안을 일컬는 말이다.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도심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라고 한다. 조선의 가장 중요한 땅이었던 한성 땅에는 관문이 있었고, 궁궐과 고관대작들과 왕족들이 살던 마을과 시장, 도읍을 굳건히 지키던 산과 자연이 있었다. 몇 차례의 전쟁과 일제강점기, 숱한 고난들을 견뎌낸 조선의 유산들은 거듭된 재건과 복원을 통해 끈질기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성을 넘어 한성 땅으로 들어오려면 지나야했던 문들. 500년간 파루(오전 4시경)에 문을 열어 사람을 통행시키고 인정(밤 10시경)에 문을 닫아 사람의 통행을 금지시켜 한성을 지켰던 문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제 기능을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4대문은 서울을 상징하는 문화재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남대문으로 잘 알려진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정문이자 대한민국의 국보 1호이다. 숭례문은 한강과 도성을 최단거리로 잇는 문으로 사람과 물자의 통행이 가장 많았다. 따라서 자연스레 숭례문의 문 밖에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1398년도에 완공되어 숱한 고난의 시간을 거쳐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남아있었으나 2008년 화재로 1층은 약 10%, 2층은 90%가 소실되었다가 2013년 복구되었다.
동대문으로 잘 알려진 흥인지문은 서울의 동쪽 관문으로 보물 1호이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상 서울 동쪽 낙산의 지형이 낮아 동쪽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고 한다. 이를 막기 위해 원래 흥인문이었던 이름에 '지'자를 넣기도 하고, 다른 문과 달리 옹성을 쌓기도 했으나 결국 임진왜란과 6.25 전쟁 때 적군들이 흥인지문을 통해 들어오게되었다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돈의문은 서울 성곽 서쪽의 문으로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으며 터만 남아있다. 그 터는 현재 종로구에 있지만 과거에는 서대문구에 소속되어있었으므로 서대문구의 명칭을 통해 서대문의 역사는 계승되고 있다. 숙정문은 북쪽 대문으로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을 하지 않았다. 풍수지리에 따라 '음'을 상징하는 북쪽 문을 열어놓으면 여자들의 음기가 강해진다고 하여 항상 닫아놓았다고 하며 현재 모습은 1976년에 복원한 모습이다.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북동쪽을 지키던 문이다. 북쪽 대문이던 숙정문과 북쪽 소문인 창의문이 실질적으로 문의 역할을 하지 못해 혜화문이 유일하게 북쪽으로 향할 수 있던 문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전차길을 내며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없어졌으며 1990년대에 복원하였다.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남동쪽에 있는 소문이다. 이 문은 조금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없어진 소의문과 함께 죽은 사람의 시신을 내보내던 문이라는 점이다. 6.25 전쟁 때 문루가 파괴되어 1975년 복원했다. 한양도성의 서남쪽을 지키던 소의문(서소문)은 멸실되었다.
지금은 자유롭게 넘나들수 있는 서울의 경계가 옛날엔 굳은 성벽으로 막혀있었다니, 거기다 앞에 있어도 그냥 지나쳐가며 생각해보지 않았던 남대문이 예전엔 정말 서울의 '대문'의 기능을 수행하던 건물이라니. 새삼 100년 전 서울은 지금은 드라마로만 볼 수 있는 판타지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사대문과 사소문, 한양도성의 관문을 통과하면 이제 조선의 도읍인 한성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어서 조선이 현재의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문화 유산인 궁궐과 자연, 그리고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