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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남주 Aug 30. 2021

벌을 줄 때의 핵심

     우리 모녀의 유튜브 ‘해피바이러스 모녀(해녀)’의 일상에서 올해 시작한 ‘롤러코스트 2탄’을 보다 글감을 얻었다. 축구하는 딸래미는 어릴 때부터 한 살 위인 오빠를 이겨먹기로 유명했다. 오빠의 성격이 워낙 유순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별스러운 여동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빠는 동생의 모든 것을 챙겨주었다. 어릴 때부터 동생과 함께 어린이집을 다녀오는 책임감이 강한 오빠 덕분에 딸래미가 씩씩하게 자랄 수 있었다. 지금도 오빠를 상 남자라 부르며 찐 남매의 의리를 과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싸우지 않고 자라지는 않았다. 싸우는 게 사는 재미라고 여기는 딸래미의 흑 역사를 한 번 들춰내보기로 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벌을 주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두 아이는 별로 말썽을 피우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가출 할 생각 없느냐”는 농담도 건넬 정도였다. “집 나가면 개고생인데 왜 나가느냐”는 답이 돌아 올 정도이니 철이 빨리 들어서 인지 손 댈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딱 한번!!! 크게 벌을 주고 매를 들었던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3,4학년 쯤 되었던 것 같다. 남매는 일찍 자립을 해서 둘이서 집을 지키는 경우도 흔했다. 저녁을 먹고 엄빠가 동네 마실을 다녀 온 사이 대형 사고를 쳤다. 아들의 빰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딸래미는 야단 맞을 것이 두려워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우는 이유를 물어본 순간 안방에 베란다 나가기 전에 있는 중간 유리창이 깨졌다는 것이었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엄마는 일단 깨진 유리를 치우는데 집중했다.  아빠는 아들의 얼굴에 난 상처를 치료한 후에 둘을 세워두고 자초지종을 들었다. 이유인 즉 오빠가 자꾸 놀리면서 안방 베란다 쪽으로 도망을 가는데 쫒아가다가 엉겁결에 창문을 쳤는데 유리가 깨진 상황이었다.  딸래미의 화난 주먹에 깨져버린 유리조각이 아들의 얼굴에 튀어 피가 흐르니 남매는 서로가 당황한 순간이었다. 엄마인 나는 유리조각을 쓸어 담으면서 감정컨트롤을 못한 딸래미의 행동에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한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했기에 절대 용서가 안 되는 순간이었다. 아빠가 유리를 깬 책임은 딸래미에게 있지만 화나게 한 원인을 제공했으니 아들에게 먼저 몇 대 맞을 거냐고 물었다. 책임을 느낀 아들이 10대를 맞겠다고 해서 딸래미는 책임이 배가 되니 20대를 맞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잘못을 부정 할 수 없는 딸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먼저 10대를 맞으면서 헤아리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딸래미는 무서워서 더 크게 울었다. 그 울음에 마음이 약해지는 우리가 아니었다. 때리는 아빠는 차분하게 아이들에게 스스로 맞는 매를 헤아리게 했다. 잠 든 아이들의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면서 마음이 아팠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느끼게 해 준 경험이었다.     

 

벌을 줄 때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때려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때린다면 얼마를 때려야 하는지 등 벌의 형태나 종류가 아니다핵심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그 잘못과 벌을 주는 이유를 납득시키느냐 하는 것이다.(중략부모는 강요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설명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아이들을 키울 때 읽었던 전혜성 박사님의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는 책의 한 부분이다. 전혜성 박사님은 90년대 미 국무부 차관보인 고경주님의 어머님이시다. 두 아이를 키울 때 자녀교육의 롤 모델로 선정하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던 어른이다.      


체벌을 할 때 중요한 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체벌하는 어른의 감정도 컨트롤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른의 입장에서 기분 나쁘다고 체벌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도 통제 못 하면서 아이들에게 벌을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게가 옆으로 걸으면서 새끼들에게 자꾸 똑바로 걸어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딸래미는 이 사건으로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고 화가 나는 상황을 극복하는 힘이 생긴 것 같다.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면 자신이 벌을 받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 벌어 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아들 녀석은 지나친 장난은 매를 번다는 이치를 그 때 터득할 수 있었다고 본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자신이 맞을 매를 정하는 것과 왜 맞아야 하는지를 인지할 정도의 시간이 되었다. 그 때 울 부부가 아이를 키우는 데 부드러우면서도 엄하게 키우는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깨진 유리를 치우면서 두 아이를 체벌하는 아빠에게 힘을 실어주는 엄마의 모습은 평소의 부드러운 엄마가 아니었다고 한다. 지금도 아이들은 엄마는 강단이 있어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사람으로 인지하고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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