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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우 Sep 01. 2021

악은 누구인가

넷플릭스 시리즈 D.P.(2021)

현재 넷플릭스 시리즈 D.P.가 큰 화제를 몰고왔다. 탈영병들을 체포하는 헌병 D.P. 군탈체포조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그동안 군생활을 다룬 적지 않은 작품들이 등장한 와중, 넷플릭스 시리즈 D.P.의 무엇이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을까.




이 리뷰는 넷플릭스 시리즈 D.P.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안준호 이병과 한호열 상병

극중 주인공 안준호는 군탈체포조영입되어 탈영병들을 체포한다. 탈영병들은 각기 다른 사유로 국가의 의무를 어기고 군부대를 탈출한다. 국방을 대표하며 다시 의무를 다시금 마치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한국에서 군대를 다녀온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있겠지만, 탈영병들 개인의 사연들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말도 안된다고  수도, 안쓰럽게 보일수도 있는  사연들은 드라마라는 창작물임에도 현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군필자들의 개인적인 어느 지점과 인물들을 떠올리게 하면서 드라마는 진행된다. 와중에 인물들의 케미는 훌륭하고, 이야기 진행 자체도 리듬을 잃지 않는다. 에피소드 3,4 같은 경우 드라마의 진행을 위해 추리,수사물의 느낌을 강하게 띄고 있지만 필자는 안준호 이병과 한호열 상병, 박범구 중사 그리고 조석봉 일병 사이에서의 이야기가  시리즈의 탄생 이유라고 생각했다.




안준호 이병

군대는 하나의 뜻으로 이루어졌다. 조국을 지키기 위한다는 그 신념아래에 개인의 신념은 뒤로하고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영향력 아래의 개인들은 서로를 물어뜯게 된다. 그 행위는 철저히 계급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필히 피해자를 남긴다.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가. 군대라는 미친 사회에서, 적어도 국방의 의무를 지는 대상한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버티는 것 뿐이다. 시스템을 뒤바꿀 수도, 비극을 피할수도 없는 체제안에서 버티어내는 자들과 그렇지 못하는 자들을 구분지어 사고하게 된다. 다들 그러니까, 모두 가는 곳이니까. 폭력은 정당화되고 축소된다. 사실 현재의 군대는 이것이 현실이다. 폭력을 당한들 당연시되어 간다. 그 관념은 전염된다. 혹자는 별 대수라고 한다. 과장이라고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군대에 가지고 있는 시각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헌병대 수사과 군탈담당관 박범구 중사

박범구 중사는 작중 헌병대장에게 상명하복을 어기며 말한다. 이놈들이 전우를 쏘기 위해 군대를 왔느냐. 박범구 중사가 대변하는 사람들의 입장은 고무적이다. 누구라고 오고싶어서 오냐는 군대에서 자신의 전우를 총으로 쏴죽이는 일만큼은, 명령 불복종임에도 막으려는 안타까운 신념은 아이러니하게도, 군대이기 때문에 묵살당한다. 그 선은 박범구 중사의 마지노선이었다. 상부의 명령으로 서로를 해하는 일을 막고싶었던 것이다. 이미 폭력은 불가피한 상황이나, 전우에게 총구를 겨누는 일은 참으로 비극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군대가 가장 기피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은 군대의 시스템인것. 어느하나 선명하지 않은 곳에서 조국의 안보를 위해 겨눠져야할 총구는 현재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대상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에피소드1에서 안준호의 선임 박성우 상병이 자신들의 친구를 가리키며 이야기한다. 이 친구는 어떤 빽으로, 이 친구는 아버지가 누구라서, 군대를 뺐다고 말이다. 안준호의 표정은 내 표정과 같았다. 최소한 다들 끌려온 군대안에서 서로를 물어뜯는 일만은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박범구 중사는 박성우를 두드려 패던 안준호를 말리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모두가 하니까, 모두가 가니까 이 악물고 버티는 이들은 무엇에 기대어 짧지 않는 시간을 버텨낼까. 누군가는 후임을 괴롭히며 버텨내고 누군가는 쉽게 무시당할 신념을 지켜내며 버텨낸다. 부조리가 낳아 탄생된 범죄는 용서되는가? 그럴 순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탄생하는가. 악은 누구인가. 작중 조석봉 일병은 군대가 낳은 최악의 참상이다. 누구보다 후임을 챙겨주고 (황장수 병장을 비롯한)선임들에게 부조리를 당한 인물이다. 그의 행위는 악이라고 할수 있나. 선임이 잘못하였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조석봉의 행위엔 잘못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피해자를 피해자라 할수도, 가해자를 가해자라 할수도, 절대악을 찾아볼 수 없는 혼란스러운 그곳에서 결국엔, 안준호의 울음소리만이 울려퍼질 뿐이다. 매우 좌절스러운 점은 조석봉 일병이 망가져가는 과정은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신의 지인일수도, 가족일수도, 혹은 본인일지도 모를 노릇이다. 의무를 다하고 온 이들이라면 알 것이다. 황장수 병장은 분명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그를 비난할 수 있는가? 가학성의 정도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과연 화면을 바라보는 군필자들은 군생활의 무엇을 떠올릴까. 누구를 떠올릴까. 미안한 감정을 떠올릴까. 죄스러운 감정을 떠올릴까. '그때 나서서 막았다면 어땠을까'라고 떠올릴까. 과연 그 양심의 영역에서 벗어나 떳떳할만한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



사람이 먼저라는 말에 동의한다. 모두가 방관하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서는 것은 분명히 쉬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정답을 알고 있다. 모두가 한 곳만을 바라볼때, 다른 곳을 봐야하고 다른 말을 해야한다. 그 힘은 선의로 이루어진다. 상호간의 관용과 존중으로 빚어진다. 이렇게 쉬운 진리가, 집단 안에서 실현되기란 참으로 버거운 일이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뭐라도 해야, 바뀌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의 엔딩이 비극이라 맘에 든다. 현실이다. 당신 옆의 누군가, 이 시리즈를 재밌게 보았다던 누군가, 도저히 끝까지 보지 못하겠다는 누군가들의 현실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로 매우 오랜만에 현실을 직시하는 군대 창작물을 본 것 같아 인상적이다. 나의 소대장, 부소대장, 선임들, 동기들, 후임들. 분명히 이 시리즈를 보거나 듣거나 할 것이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무엇이 잘못 되었나. 시스템이, 개인이, 집단이, 방관이,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하는가. 뭐라도 해야한다면, 누가 해야하는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2014년과 2021년이 다르다면, 과연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 질문에 밝은 표정으로 답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좋겠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에.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직시하는 것이다.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응시해야 한다. 그것에서 시작된다. 악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통탄할 노릇이지만서도, 뭐라 대답할 수도 없다. 조석봉의 얼굴이 생각난다. 정말 어디에서 본 것만 같다. 엄마를 찾던 조석봉이 생각난다. 이 시리즈가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참 공감된다고. 혹자가 과장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이 시리즈에 공감하는 남자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한국에서 남자가 되는 것은, 희한한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남자들은 폭력을 참아가면서, 수치심을 느끼면서 남성이 되어간다. 그래서 한국에서 말하는 진짜 남자는 폭력에 둔감하다. 둔감하다는 것은 쌍방향이다. 폭력을 당해도 당하는 줄 모르고, 저질러도 그게 자꾸만 폭력이 아니라 한다.
-오찬호,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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