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현우 Oct 13. 2022

그럼에도 여기, 지금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

바로 다음 아카데미의 강력한 우승 후보라 할 수 있는, 화제의 입소문을 몰고왔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한국에서 드디어 개봉했다. 본 영화는 화려한 편집과 시각효과, 멀티버스를 사용했지만 완벽한 오리지널리티를 가지고 있는 뛰어난 각본과 이야기로 양산형 영화들 사이에서 단언 독보적인 작품으로 여겨졌다. 한국의 영화팬들을 안달나게 했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감상하고, 기대했던 만큼이나 독창적이고 신비로우면서 나의 삶으로 회귀하는 경험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겠지만, 자신만의 길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당당하게 엽기적인 면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우리 삶을 바라보는데 전형적인 감동과 이야기를 선사하는 본 영화는 자신만의 독보적인 자리를 지켜내며 A24에서 제작한 영화 중 수익면에서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힘이 부치고, 의미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것을 추천한다.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본 영화는 미국에 이민자의 이야기(중국인)를 담고 있다. 에블린은 코인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느 이민자와 다름없이 바쁘고 고된 하루들을 보내며 살아가고 있다. 세탁소의 주인장으로서의 역할을 행함과 동시에 누군가의 아내, 어머니, 딸로서 충족시켜야 하는 것에 힘이 부치던 와중 세무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는데, 다른 차원의 남편 알파 웨이먼드가 등장하면서 에블린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영화에서 양자경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양자경의 연기는 장르를 뛰어넘을 뿐더러 캐릭터를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데 훌륭하게 성공한다. 여담으로 본 영화는 양자경이 할리우드에서 데뷔한 이래 처음으로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다. 또한 웨이먼드 역의 조나단 키 쿠안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 : 마궁의 사원'과 '구니스'에서 아역으로 활약한 뒤 할리우드에서 동양계 배우로서 한계를 느끼고 배우로서 활동하지 않다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성공으로 다시금 배우로 활동하기를 마음먹었다고 한다. 90이 넘었음에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제임스 홍의 활약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캐릭터 분배가 훌륭하게 이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가 가진 큰 힘 중 하나다.





수많은 레퍼런스를 다루는 실력을 보고있자면, 장르에 대한 감독() 이해도가 수준급이라는 것을 깨달을  있다. 특히 동아시아 영화에 대한 레퍼런스는 오마주에 가까울 정도로 선명하게 목격할  있다. 쿵푸와 무술은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요소들이고, 중국어로 이루어진 대사도 상당하다.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은 차원에서 그려지는 장면들은 노골적으로 왕가위 영화의 분위기를 가져온다. 또한 편집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없는데, 영화에서 이루어지는 매치컷은  자체로 스토리텔링의  다른 방식으로 사용된다. 에블린의 차원과 다른 차원의 접점을 묘사하는데 매치컷이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의도적으로 눈이 따라   없을 정도의 속도를 구사하면서   없는 우주의 층을 설명하는 데도 훌륭하게 작용한다. 패닝,플래시백,몽타주,같은 구도에서 장면을 전환하는 식의 기법들을 사용하면서 비주얼 코미디로서도, 액션씬으로서도, 비주얼 스토리텔링으로서도  영화는 흔히 말하는 양산형 영화급을 달리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사용되는 시각효과에는 LED 적극 활용한 것이 눈에 띄며, 제대로 촬영 했음에도   사용되지 않고 멀티버스의 스케일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방대함을 표현한다.  과감함과 당당함에 관객들은 압도당한다.





분명히 독창적인 영화임에는 분명하지만 본 영화는 결국 전형적인 이야기의 결론에 다다른다. 이것은 절대 이 영화의 단점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태 느껴본 적 없던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다가 결국 지금, 나의 삶으로 회귀하는 훌륭한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다. 만약 본 영화처럼 다중차원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야기는 보통 이렇게 흘러 갈 것이다. 주인공이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차원의 내가 있는 수많은 삶을 통과하면서 결국 자신의 차원으로 돌아와 본인의 차원과 본인의 삶, 주변 사람들이 우주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자각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본 영화가 유독 독창적인 것은, 연출과 진행방식을 배제하더라도, 적극적으로 1세대, 2세대 이민자의 삶과 가족 구성원으로서 서로에게 의미하는 것, 거기에서 스케일을 크게 늘려서 '내 삶이 이 꼴이 된 이유'라는 인간으로서 가지는 근원적인 질문에 가닿기 때문이다. 에블린은 영화에서 꾸준하게 자신의 삶에 뚫려있는 구멍에 집착한다. 자신이 기대를 저버린 아버지도 챙겨야 하고, 딸은 엇나가고, 남편은 성에 차지 않는다. 이 삶의 생생한 불행과 불만을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이 '베이글'이라는 것인데 에블린은 불완전한 삶과 이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그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완벽하지 않은 나의 삶을 사랑하자는 어찌보면 뻔한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 수 있을까.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부분에서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에게 넘어가 웨이먼드를 찌른다. 에블린은 지금껏 문제를 해결해오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무력감에 패배하기 직전에 이른다. 알파 차원에서 넘어온 인원이 에블린을 제압하기 위해 서서히 다가오는 그 순간에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선사한다. 작중 내내 무력하고 한심한 남편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던 웨이먼드는 그들에게 친절로 다가간다. 다정함으로 승부한다. 완력으로 적을 제압하고 삶의 문제에 대응하던 에블린은 그 순간에야 깨닫는다(에블린이 사진에서 나오듯 인형 눈으로 세번째 눈을 개안하는 식으로 표현된다). 웨이먼드는 멍청한 것이 아니라, 자존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문제에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들을 상대한다는 것을 말이다.




여기에서 에블린의 태도는 완벽하게 전복된다. 꼼짝없이 전재산을 몰수당하려는 그 순간 웨이먼드는 공감으로 조사관을 상대하고 문제를 해결한다. 에블린은 그제서야 그의 방식을 수용하고 아버지에게 딸의 성정체성을 소개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한다. 이후 에블린의 딸 조이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차를 타고 떠나려 한다. 지금껏 문제를 자신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만 했던 에블린은 타인의 입장에 공감하는 방식을 취한다. '사랑하니까 내 말대로 해'가 아닌,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겠다는 선택을 존중한다. 그리고 에블린은 웨이먼드가 그랬듯, 공감하려 한다. 떠나려면 떠나라.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차원을 넘나들고, 멋지고 찬란한 인생의 나를 보았음에도 에블린은 지금, 여기의 너와 함께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더 이상 에블린은 자신의 삶이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찾으려 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강요되는 선택과 본인의 실수로 점철된 인생을 복기하지 않는다. 에블린은 그제야 울퉁불퉁한 본인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본 영화에서 가장 성공적인 삶을 사는 차원은 웨이먼드와 에블린이 서로를 선택하지 않은 차원이다. 하지만 웨이먼드는 그 세계에서 조차 에블린에게 돌아온다. 돌아와서 고백한다. "너가 나를 또 아프게 해도 여기가 아닌 다른 삶에서는 너와 함께 세금을 내면서, 세탁소를 운영하면서 살고 싶어." 웨이먼드는 약해서 진 것이 아니다. 지고 있던 것이 아니다. 웨이먼드는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상대를 고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면서, 에블린은 가족으로서 함께 해결해 나가려 한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곳을 방문했음에도, 에블린은 자신의 삶에 남기를 선택한다. 그 세계에는 우주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에블린의 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 사람들이, 내가 있으니까. 내가 나의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우주 그 누가 사랑해 주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지금 우리 옆의 사람들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적이 밉더라도 사랑으로 대할 수 있다. 가족이 미워지더라도 한번 더 이해하려 노력할 수 있다. 공감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시도하려 하지 않는다. 에블린은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다른 차원의 잡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모든 실패와 실망, 거절이 이끈 본인의 모난 인생에 남아 있기를 선택한다. 그러니 우리도 삶의 후회스러운 날들과 어리석었던 선택과 나약한 자신 그리고 나를 사무치게 쓰라리게 했던 상처마저 사랑하자. '나의 삶'에 남아 있기를 선택하자.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 그런 것은 없다. 온 우주를 다 뒤져도, 너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곳은 여기, 지금 밖에 없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80년대가 우리에게 남긴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