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참, 육아와 닮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들어하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자’입니다. 이 아이가 태어난 모습 그대로, 이 아이의 고유성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키우려 합니다. 어른은 더 많이 살아봤기 때문에 무엇이 더 좋은지, 안 좋은지 잘 압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내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이것은 옳다’, ‘이것은 그르다’, ‘이것은 해라’, ‘이것은 하지 마라’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자칫 그 행동이 ‘아이가 틀리고, 어른은 옳다’라는 잘못된 기준을 만들까 봐 걱정입니다. 그런 기준이 생겨버리면 아이는 항상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어른은 항상 답을 줘야 합니다. 서로가 얼마나 부담될까요? 얼마나 답답하고 경직된 관계가 될까요? 사실 부모인 내게 좋고 옳았던 행동이 반드시 내 아이에게도 좋고 옳은 일이 되지는 않더라고요. 좋고 나쁨은 소위 말해 ‘개취’입니다. 개인의 취향, 가치관, 사고방식 등 많은 것의 영향을 받아 달라집니다. 그러니 아이에게 무언가를 제안할 때는 한번 더 고민해봐야 돼요, 정말 아이 입장에서 그게 좋은 게 맞을까.
출처:픽사베이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쓰기를 가르칠 때는 자꾸 아이의 부족한 점만 보게 됩니다. 종합적 사고가 필요한 글쓰기인데, 아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삶의 경험이 그만큼 부족하고, 머리가 아직 다 여물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뇌가 커가고 있어요. 가르치고 교정할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러니 아이에게 ‘이것은 틀렸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마라’ 등의 부정적 피드백을 많이 주게 됩니다. 큰 그림은 아이의 글쓰기를 잘 지도하기 위함인데, 그 속으로 들어가면 소위 말해 지적질만 해대게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글을 가르치는데 아이가 당연히 글쓰기가 싫다고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먼저 부모님들께 위로의 말을 하고 싶어요. 자녀의 글쓰기로 답답함을 느끼고 불안감을 느끼는 많은 부모님들께 괜찮다고, 원래 그런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불안한 그 마음에는 ‘아이가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에 대한 걱정이 있으신 거잖아요. 그런데 뒤처지지 않아요. 아이는 제대로 잘 크고 있습니다. 글씨가 엉망진창이고 글의 순서도 엉망이고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쓴다고 답답해하시지만 그게 정상입니다. 원래 아이는 그렇게 글을 씁니다. 그럼 그대로 두란 말이냐, 아니요. 그 뜻이 아닙니다. 아이는 원래 그렇다는 이해를 바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그대로 받아들이면 부모의 불안감이 줄어듭니다. 불안감이 줄어들면 ‘이렇게 해’, ‘저렇게 해’ 소리가 줄어듭니다. 아이를 대할 때 목소리 톤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가 아니라 ‘이렇게 해보면 어때?’가 되는 것입니다. 옆에 앉은 부모가 잘했다 못했다를 따지는 평가자가 아니라 나를 돕는 조력자로 느껴질 때, 아이는 조금 더 편안함을 느끼고 조금 더 머리가 굴러갑니다. 그러면 한 줄이라도 더 써지게 되겠지요. 육아도 아이를 이해해야 방향이 잡히듯이 글쓰기도 그 아이의 고유성을 파악해야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독서록이나 일기 쓰기 과제를 내줄 때 선생님들께서는 몇 줄 이상이라는 기준을 내세우시는데요. 아마 보통의 아이들이 그만큼의 양도 채우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셨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에게 쓰고 싶은 글을 쓰게 하면, 아이는 노트 한 바닥을 다 채웁니다. 자기가 생각한 것, 자기가 쓰고자 하는 말을 그대로 적으면 아이는 글쓰기를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얼마 만큼이라는 양이 아니라, 무엇을 쓰라는 주제가 명시되겠지요. 보다 이상적인 모습이 될 것입니다.
아이가 자신의 생각을 맘껏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부모와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소리를 하더라도 그 아이의 생각을 존중하고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가장 안전한 종이 위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말이죠. 그러면 여덟 살 아이가 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열 살 아이는 어떤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지, 열두 살의 삶에 중심엔 무엇이 있는지 보실 수 있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