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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작 Nov 18. 2023

부활

    네가 있던 그곳에서, 너의 몸을 닮은

    움푹 팬 구덩이를 본다

    너의 무게가 누르고 간 자리

    너의 향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곳에

    밤의 기억들이 깨어있기를 기대하며

    나는 그곳으로 내려간다.


    너는 하늘을 올려보며 과거를 쌓아갔다

    그 과거들은 너를 짓눌렀고 그런 너를 보며

    나는 밤 끝으로의 여행을,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네가 떠난 이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향기마저 주섬주섬 챙겨 가던 너는

    기어코 모든 흔적에 칠흑 같은 밤을 덧칠했고

    그 징벌 속에서 나는 손을 더듬으며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모든 것이 밤으로 덮인 이 숲길 위에는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 한 장만이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로

    그저 던져져 있을 뿐이고

    나는 그 백지 한 장을 쥐고

    너를 닮은 그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서 만큼은

    존재하던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살아있고

    시간은 압축되지 않으며

    순간은 사라지고

    영원하게 팽창하여 걷잡을 수 없게 커져만 간다

    나는 그곳에 쭈그려 앉아 다음 징벌을 기다리며

    깨어있음을, 고독을 느낀다.


    아침의 노을이 찾아오면 나는 이 무덤을

    원래의 주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대지를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이 자리를 돌려주어야 한다.


    붉은 점 하나가 내 얼굴을 찌르고

    그 부끄러움에 눈을 뜨지 못한 채로

    내 짐들을 챙긴다

    그리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기어간다

    그곳에서 차가운 도로 위를 핥아대며

    짓눌리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바퀴벌레처럼

    나는 세계의 어긋남을 바라보지만, 어째선지

    알제의 그 청년처럼 저항을 떠올릴 수 없다.


    지금, 이 정오의 순간에

    오직 내가 떠올리는 것은

    네가 떠난 그 자리 위에 남겨진

    검은 백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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