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출생부터 보리나주까지
“Art is to console those who are broken by life.”
예술이란 삶의 의해 부서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
저에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사랑받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빈센트 반 고흐”라고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물론 미술 역사에 위대한 작가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빈센트 반 고흐, 그는 어떤 작가보다 특별했기 때문이에요. 이번 글에서는 고흐의 삶과 그가 생애 왜 사랑받지 못했고, 지금은 어떻게 사랑받고 있는지, 그의 특별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글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이름은 고흐라고 표현
고흐는 미술과 종교활동을 하는 네덜란드의 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직업은 목사, 어머니는 그림을 즐겨 그렸습니다. 다른 가족은 누가 있었을까요? 생애 고흐를 많이 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테오를 포함한 여러 동생들, 사람들에겐 고흐가 첫째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고흐에겐 숨겨진 형이 한 명 있었습니다. 고흐가 태어나기 정확히 1년 전 그의 형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태어나자마자 사망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 한가지는 그의 형의 이름은 ‘빈센트’, 고흐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죠. 이 사실 때문에 고흐는 생애 죽은 형을 대신해 살아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11살이 된 고흐는 기숙학교에서 2년간 공부 후 틸뷔르흐에 위치한 빌럼 2세 국립중학교에 입학합니다. 당시에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였으나, 우연인지 운명인지 이 학교에서는 화가 ‘콘스탄트 코르넬리스 하위스만스’가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아 어릴적부터 미술을 좋아했던 고흐는 미술수업을 열심히 들으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2년 후 그는 이 학교를 자퇴하게 되죠. 그가 학교를 자퇴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고흐가 이 때 부터 정신장애를 앓고 있었던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구필 화랑은 고흐와 이름이 같았던 (빈)센트 삼촌이 당시 파리의 화상이였던 아돌프 구필과 동업해 만든 화랑입니다. 고흐가 학교를 자퇴한 후 시간이 지나고, 가족들은 그를 이 구필 화랑으로 보냅니다. 센트 삼촌과 고흐의 아버지는 우애가 깊은 사이로 유명했는데 이 때문인지 센트 삼촌은 고흐와 테오를 자신의 자식처럼 아꼈습니다. 당시에 성공한 화상으로 평가받았던 그는 고흐를 유망한 화상으로 성장시켜 그의 모든 것을 물려줄 생각까지 했다고 하죠. 우리는 고흐가 평생 힘든 삶을 살아왔다고 알고 있지만 이 당시 고흐는 센트 삼촌의 기대와 함께 유망한 화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고흐는 구필 화랑 시절 한 화가의 작품에 푹 빠져있었습니다. 그 화가는 ‘이삭 줍는 사람들’을 그린 ‘장 프라수아 밀레’. 구필 화랑은 당시 살롱(프랑스에서 주최하는 미술전람회) 수상작들을 판화로 만들어 판매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고흐는 밀레의 작품을 접하게 되죠. 당시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고흐가 밀레에게 얼마나 빠져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밀레가 나를 자연 속으로 되돌아가게 해주었다.”, “밀레는 젊은 화가들이 모든 문제에서 의지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아버지 같은 존재다.” 고흐는 실제로 밀레의 많은 작품을 따라 그리며 그림을 독학했습니다.
전도유망한 화상이 되어가던 고흐, 하지만 그는 구필화랑에서 나오게 됩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얽히고 설켜 있습니다. 구필 화랑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던 고흐는 구필 화랑의 런던 지점을 위해 파견을 갑니다. 이 파견 과정에서 고흐는 런던의 노동자들을 보고 그들의 암울한 현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던 고흐는 미술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또 당시에 고흐는 실연당했었습니다. 고흐는 런던 파견 당시 지냈던 하숙집 주인의 딸 로예를 사랑했었죠.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이 밖에도 고흐는 구필 화랑에서 가치관 차이로 손님과 많은 논쟁을 벌였고, 그를 평생 괴롭힌 정신장애까지 더해져 그는 구필 화랑에서 나오게 됩니다.
구필화랑에서 나온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구필 화랑 이후 고흐가 처음 한 일은 영국 램스게이트 학교의 무급교사입니다. 하지만 고흐의 생각과는 다른 일을 했던 터인지 학교에 실망한 고흐는 금방 일을 그만둡니다. 그 후 고흐는 영국 감리회 소속이었던 ‘토마스 슬레이드 존스’ 목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도움으로 보조 교사로 일하던 고흐, 하지만 그에게 조울증이 찾아옵니다. 이 조울증으로 고흐는 다시 일을 그만두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만약 이 시기에 고흐에게 조울증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목사 일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고흐의 상태가 나아질 무렵 그는 다시 목사 일을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목사 일을 하길 원치 않았죠.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다시 센트 삼촌에게 고흐의 일자리를 찾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일하게 된 곳은 로테르담 근처 서점. 하지만 고흐는 얼마 안 돼 서점에서 쫒겨납니다 일로 고흐를 아들처럼 생각했던 센트 센트과 고흐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게 되죠.
집으로 다시 돌아온 고흐는 목사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흐는 목사수업을 듣기엔 너무 늦은 나이였고 목사고시를 보기엔 그의 상태도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흐의 계속된 고집으로 고흐의 아버지는 다른 목사였던 고흐의 이모부 ‘요하네스 스트릭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고흐의 정신상태가 온전치 않다는 것을 알고도 흔쾌히 자신의 주변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을 뽑아 고흐가 목사고시를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고흐는 이 목사고시를 망치고 맙니다.
그가 목사고시를 망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흐가 일부러 시험을 망친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당시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라틴어를 몰라서 시험을 망쳤다.” 하지만 테오가 고흐에게 답장한 편지에는 형이 라틴어를 몰라서 시험을 망쳤을 리가 없다고 적혀있습니다. 이 편지를 보고 사람들은 고흐가 생각한 목사의 사명,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전도하는 것’과 다르게 불필요한 지식을 쌓아야 하는 시험에 회의감을 느껴서 그가 일부로 시험을 망친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고흐가 당시에 그를 가르친 목사의 딸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인데요. 이 과정에서 고흐가 다시 정신적 혼란을 겪어 시험을 망쳤다는 의견입니다.
시험을 망친 고흐, 결국 고흐의 아버지가 직접 나서서 탄광 지대에서 활동하는 선교단체에 고흐를 보냅니다. 그가 가게 된 탄광 지대는 악명 높았던 보리나주. 이 보리나주에서 그는 광부들에게 헌신하며 전도해나갔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해고되고 맙니다. 고흐가 보리나주에서 일하던 당시 선교단체에서 보리나주에 시찰관을 파견했는데, 그 과정에서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던 고흐는 전도사로서 부적절하고 판단을 받았습니다. 해고된 고흐는 아는 목사를 찾아가 선교단체에 중재를 부탁합니다. 하지만 그 목사는 고흐가 성직자보다는 미술에 더 재능 있다고 생각해 성직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아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 말을 들은 고흐는 성직을 그만두고 보리나주 사람들의 현실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다시 미술의 길로 들어섭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드디어 미술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고흐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요?
다음은 브뤼셀로 향하게 된 고흐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글 | 아트맵 에디터 노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