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좋은 가을날, 휴가중에 떠오른 이야기.
오토바이용 부츠는 일단 벗어 놓으면 그것만의 존재감을 갖는다. 이 신발이 독특한 이유는 일정한 부분에 보호용 쇠 징을 박아서도 아니고, 페달을 찰 때 닳거나 해지지 않도록 발끝에 가죽을 덧대서도 아니고, 밤에 뒤따라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잘 띄라고 종아리에 야광 표시를 붙여서도 아니다. 그 이유는 그걸 벗을 때 우리가, 그 부츠와 내가 함께 달려온 몇 천 킬로미터의 길옆으로 내려서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 부츠는 내 어린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한 걸음에 이십일 마일을 간다는 그 신비의 신발일 수도 있다. 나는 어딜 가든 그 부츠를 신고 가고 싶었는데, 오금이 저리게 길을 무서워했으면서도 이미 그때부터 길을 꿈꿨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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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메트의 부츠와 같은 오브제가 있기 마련이다. 일상적인 용도를 떠나 나와 그것만이 공유하는 이야기. 나를 그 때의 시간이나 공간으로 데려가는 타임머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2010년부터 쓰기 시작한 지메일 계정. 이름 이니셜과 태어난 연도를 붙여 만든 고전적인 계정인데, 나는 이 이메일 주소를 매우 사랑한다. 지금은 업무용으로 쓰고 있으며 내 명함에도 이 이메일이 적혀있다. 출근을 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지메일을 켜 놓는 일.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하나의 의식으로 굳혀진지 오래다.
지메일을 켜 놓으면 미국에 있었을 때의 시간과 현재가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벌써 5년 전이 되어버렸네. 교환학생때 담당 교수님과 주고받던 이메일, 집을 구하느라 집주인들과 나눴던 대화들, 지사화팀 업무로 주고받았던 정보들, 서툰 레쥬메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새로움에 설레고 어려운 문제 앞에서 더 당찼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모습이 있는 곳. 꿈 많았던 내가 여전히 반짝이는 곳. 나는 매일 성장한다고 믿지만 때론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위로하고 지지할 때도 있는 법이다.
물론 지금도 지메일을 켜 두었다. 지메일 계정에 담긴 모든 이야기들은 내 어깨를 토닥인다. 내가 꿈꾸는 미래 그 어딘가를 묵묵히 걷고 있다고 믿게 한다. 고맙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