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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Feb 16. 2022

대릉원 톺아보기

대릉원 천마총, 황남대총, 나무 포토존 외에 둘러봐야 할 곳들

신라 왕가의 무덤들로 가득한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관광객들이 대릉원을 가면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미추왕릉을 마주하고, 2018년에 다시 개방한 천마총 내부 전시관으로가 가서 발굴 부장품들을 감상한 다음, 그 옆에 연못이 펼쳐진 황남대총을 감상한다. 마지막으로 대릉원의 또 다른 거대한 세 무덤에 둘러싸여 홀로 서 있는 작은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고 다른 관광지로 향한다.


그런데 대릉원 북쪽 태종로 건너편에 또 다른 거대한 무덤들이 있다. 황남대총과 천마총과 달리 조용한 편이지만, 봉분 위에 여러 그루 고목들이 자라고 있는 무덤이 나에게도 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지난 5일~6일 경주를 여행하면서, 나는 이곳을 먼저 찾아갔다.


경주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먼저 느티나무가 보이는 고분을 찾았다. 이름은 제125호 고분 봉황대(鳳凰臺). 둘레만 250m라 단일 고분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그런데 '대'라는 한자가 상당히 흥미로운데, 조선시대에는 여기를 무덤으로 생각하지 않고 풍수를 맞추기 위해 만든 인공산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선비들이 무덤인지 모르고 전망대처럼 여겼다고.


봉황대는 6세기에 축조되었고, 목관 위에 수많은 돌을 쌓고 봉분을 올린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그렇다면 봉황대의 나무뿌리는 봉분을 뚫고 수많은 돌 위에 있다는 거다. 바위에 씨가 뿌려지면 습기가 없어 마른다는 성경구절을 본 적이 있는데, 이 느티나무는 마르기커녕 오늘날까지 무덤을 지키고 있다. 아무래도 여기에 묻힌 신라왕이 생전에 덕이 있어 느티나무가 살아있는지도 모르겠다.


봉황대 - 냇돌에 뿌리내린 겨울 느티나무들


봉황대 앞에는 봉토가 잘리고 그루터기만 남은 무덤이 둘 있다. 이름은 금령총과 식리총. 위 봉황대와 함께 경주 노동동고분군의 일원이다. 금령총은 1924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우에하라가 발굴했다.


여기서 발굴된 것이 바로 국보 제91호 기마인물형토기. 보물 제338호 금관, 금제허리띠, 팔찌 등도 발굴되어서 신라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식리총(飾履塚)은 '식리'라는 한자 그대로 서역 미술의 영향을 받은 금동장식신발이 발굴되어서 지어진 무덤이다.


서쪽 건너편에는 또 다른 고분군들이 있는데, 경주 노서동고분군이다. 건너편에는 1921년 일제에 의해 발굴된 후 그루터기만 남은 금관총이 있는데, 바로 위에 기념관을 짓고 있다. 2022년 6월에 개장한다고 하니 기대해보자.


이곳에서는 국보 제87호 금관총 금관 및 금제관식과, 국보 제88호 금제 허리띠가 발굴되었다. 금제 허리띠는 1927년 도난당한 아픔이 있었는데, 경찰의 집요한 추적과 심리전으로 인해 범인이 경찰서장 앞에 보따리에 담아서 다시 반환했다고 한다. 다만 범인은 잡지 못했다고.


6월에 열리는 금관총 기념관


금관총 부장품. 위에 국보 제87호 금관총 금관이 있다.
가까이에서 본 금관총 금관


그 옆에는 표주박 모양의 그루터기만 남은 고분이 있다. 앞에는 '서전국왕(瑞典國王)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전하 서봉총발굴기념비'가 있는데, 서전국은 스웨덴을 의미한다.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오늘날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의 할아버지다.


그가 황태자였던 시절 일본을 국빈방문했는데, 일제가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이 고분 발굴에 참여하는 것을 권했다고 한다. 황태자가 승낙한 후 여기에서 금관 출토작업에 참여했기에, 고분의 이름이 서전의 '서'와 봉황의 '봉'을 합친 서봉총이 되었다. 서봉총 뒤에는 1994년 그의 손자가 심은 기념식수가 있다.


아, 우리가 아닌 외세가 발굴했다는 아픔이 서려있어서 그루터기만 남은 무덤들이 나를 불러냈구나. 하지만 이 고분군에서 해방 후 우리 손으로 처음 발굴한 곳이 있는데, 바로 고분군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호우총이다. 호우총인 이유는 내물왕 시절 고구려와 신라관계를 나타낸 호우명토기가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건너편 천마총과 황남대총으로 우리 발굴 역사가 이어진다.


그루터기만 남은 서봉총 앞 기념비 - 일제강점기 시절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황태자의 방문을 말해준다.
해방 후 우리손으로 발굴한 호우총(좌)와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우, 국립경주박물관 복제품,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마총과 황남대총


우리가 흔히 대릉원이라고 부르는 황남동고분군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능은 신라 김씨 최초의 왕, 미추왕릉이다. 백제의 침략을 잘 막아내고 백성들의 어려움과 근심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미추왕.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능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아직 모른다고 한다. 다만 경주 김씨 문중에서 오랫동안 이 능 앞에서 제사를 지냈기에 현재 명칭으로 굳혀졌다. 삼국사기에 미추 이사금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내용이 있어, 대릉원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미추왕릉을 뒤로 하고 왼쪽 길을 따라 여러 무덤을 보고 내려오면, 천마총이 있다. 2018년에 다시 개방된 전시관을 따라 들어갔는데, 돌무지덧널무덤의 모형과 부장품들을 볼 수 있었다. 천마총하면 흔히 국보 제207호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를 떠올린다. 장니 또는 말다래는 말을 탈 때 필요한 안장 양쪽으로 길게 늘어뜨린 부속구다.


최초의 경주 김 씨 이사금. 미추왕릉의 묘
천마총 외부


그런데 전시관을 보니 내가 몰랐던 또 다른 두 천마도가 있다. 하나가 백화수피제 천마도 말다래, 또 다른 하나는 대나무살을 엮어 바탕판을 만든 다음 금동판에 천마문을 새긴 죽제 금동천마문 말다래다. 이 두 천마도는 발견될 때 보존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경주국립박물관에 특별 보관되었다가 2014년 3월이 되어서야 공개 되었다.


1973년 4월 박정희 정권 시절 청와대는 천마도보다 왕관과 부장품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천마도는 학자들만 관심을 가졌다고. 원래는 백화수피제 천마도가 먼저 세상에 보였고, 이틀 뒤 천마도 장니가 발굴되었는데, 당시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김정기 발굴 단장은 귀중한 천마도가 파손될 위험성이 있어서 힘이 쭉 빠지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천마도는 다행히 잘 수습되었다. 오늘날 역사 교육에서 빠질 수 없는 신라 유품이다. 천마도 외에 신라의 대외교류와 관련된 유물도 전시관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유심히 보자.


천마총 발굴 당시 부장품의 위치
백화수피제 천마도 말다래 복원도(좌)와 죽제 금동천마문 말다래 복제품(우) - 천마도는 국보 207호를 포함해 3쌍 6점이 있다.


천마총을 나오면 오른쪽 편에 연못이 있다. 그 뒤로 두 개의 언덕이 서로 이어진 모습의 고분이 있는데, 바로 황남대총이다. 상당히 규모가 큰 고분이라 왕의 무덤임에는 틀림없다.


황남대총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은 바로 왕관이다. 왕관이 발견된 곳은 북분. 그런데 북분의 은제허리띠 꾸미개에 '부인대(夫人帶)'라고 적혀 있어서, 묻힌 이는 왕비일 가능성이 높다고. 반면 왕으로 추정되는 남분에는 상대적으로 덜 화려한 금동관이다. 왜 북분에 더 화려한 왕관이 부장품으로 남았는지는 아직까지도 학계에서 논쟁거리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포토존을 뒤로 하고 황남동고분군을 나섰다. 1970년대의 고고학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천마도와 같은 삼국통일 전 신라의 기마문화와 대외교류가 어땠는지를 풀어주는 열쇠가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부장품에 초점을 맞춰서 발굴조사기간이 상당히 짧아 깊이 있게 조사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그럼 오늘날 신라 무덤의 조사는 어떻게 이뤄질까?


연못 뒤로 보이는 황남대총, 좌측이 여성이 묻힌 북분, 우측이 남성이 묻힌 남분이다.


황남대총 남분 부장품(좌), 왕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는 화려한 금관 대신 수수한 금동관모(우)가 나왔다.


대릉원 포토존


쪽샘지구 44호 돌무지덧널무덤


황남동고분군 오른쪽 담장 건너편 쪽샘지구를 잊지 말자. 대릉원 바로 옆에 우물이 있어 쪽샘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곳의 무덤은 크기가 작아 아무래도 왕족보다는 귀족들이 묻혀 있는 것 같다. 쪽샘지구가 정비되기 전에는 무덤 사이로 한옥들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시 작품들로 가득한 흰 가옥 하나만 외로이 남아 있다.


가옥 뒤에는 돔형 건물이 하나 있다. 쪽샘지구 44호 고분의 발굴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현장이다. 조사를 시작한 건 2014년 5월. 이전의 발굴된 능과 달리 무려 8년이나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고고학 뿐만 아니라 토목과 연관된 봉토와 호석(능묘의 봉분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는 돌), 적석도 자세히 조사하기에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건 당연하다.


쪽샘지구에 남은 옛 집의 흔적 - 기와에 수많은 시구(詩句)로 가득하다.


쪽샘지구 44호 돌무지덧널무덤 발굴현장

최근 조사에서 금 장신구들과 은장도가 확인되어서 이곳의 매장자는 신라 최상층 여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좀 더 주목해야 하는 부장품은 비단벌레 금동장식, 바둑돌이다. 비단벌레 장식은 세계적으로도 현존 유물이 거의 없는데, 여기서만 수십여 점 나왔다고 한다. 바둑돌은 이전에 주로 남성의 무덤에서 발견되어 남성의 전유물로 생각했는데, 44호 고분으로 이를 뒤집게 되었다.


이번 대릉원 경험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신라 고고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정치권력이 중심이 된 단기간의 부장품 발굴에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장기간 조사를 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작은 냇돌을 포함한 무덤의 모든 것을 자세히 조사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분 하나만으로 어마어마한 지식이 나올 수 있겠다는 기대도 해본다. 신라 왕가의 무덤인 대릉원에 와서 천마총, 황남대총, 나무 포토존 뿐만 아니라, 주변 왕릉도 깊이 있게 보는 것은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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