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은 신라의 영광과 조선시대의 경주
대릉원 남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천문대인 첨성대가 서 있다. 그래서인지 불국사와 석굴암 못지않게 첨성대 주변에도 관광객들로 가득하다. 특히 비단벌레 전기차 매표소부터 첨성대로 가는 길에 넓은 잔디밭이 펼쳐 있어서 가족들과 연을 날릴 수 있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첨성대 정남쪽길로 걸어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경주 김 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계림이 나온다. 신라 건국 때부터 있었다고 하니 무려 2,000년의 역사가 깃든 셈이다. 오랜 세월을 버틴 고목들을 뒤로하면 신라에서 조선시대로 바로 넘어가는 느낌이 든다. 바로 경주향교와 경주 최 씨 고택들로 가득한 교촌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신라 때의 위상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조선시대 경주도 당시 광역시급의 위상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마을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신라의 첨성대부터 조선의 경주 위상을 보여주는 교촌마을까지로 이어지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릉원 남쪽 외로이 서 있는 첨성대와 김알지의 계림
국보 제31호 첨성대. 이번에는 해질녘에 와서 그런지 첨성대를 비추는 보랏빛 조명이 나에게 인상 깊게 다가온다. 이전에는 동양에서 오래된 천문대라고 들었는데, 스톤헨지가 천문대가 아닌 제단이라고 학계에서 주로 말하고 있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홍보하기도 한다. 그럼 첨성대에 대한 옛 기록은 어떻게 적혀 있을까? 삼국유사 저자 일연은 아래와 같이 간단히 기록했다.
别記云是王代錬石築瞻星䑓.
별기(別記)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善徳王知㡬三事)>
조선시대 초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瞻星臺。 【在府城南隅, 唐 太宗 貞觀七年癸巳, 新羅 善德女王所築。 累石爲之, 上方下圓, 高十九尺五寸, 上周圓二十一尺六寸, 下周圍三十五尺七寸。 通其中, 人由中而上。】
첨성대(瞻星臺) 【부성(府城)의 남쪽 모퉁이에 있다. 당나라 태종(太宗) 정관(貞觀) 7년 계사에 신라 선덕 여왕(善德女王)이 쌓은 것이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위는 방형(方形)이고, 아래는 원형(圓形)으로 높이가 19척 5촌, 위의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둘레가 35척 7촌이다. 그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가운데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정관 7년은 선덕여왕이 즉위한 지 2년째가 되는 해(633)다. 1,400여 년 동안 축조된 모습 그대로 수많은 세월이 지나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것을 보면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신라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외롭게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첨성대 아래에 수많은 건물터 흔적들이 있으니까. 첨성대에 영혼이 있었다면 신라시대에 함께 있었던 동료들이 점점 사라지고 저 멀리 고분들만 남은 모습을 보면서 쓸쓸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위 두 기록에는 첨성대가 어떤 기능을 했는지 명확한 기록이 없다. 천문대라면 어떻게 첨성대 안에 들어가서 별을 관측했을까? 위에 있는 우물 정(井)자형 돌 꼭대기까지 올라간 후, 다시 안쪽으로 내려와서 네모난 창을 통해 별들을 살펴봤다고 한다. 그런데 안이 매우 좁은 것 같다. 게다가 오늘날 천문대는 산에 주로 있는데, 신라 시대에는 왜 평지에 지었을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천문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신전, 영성(靈星)제단과 같은 종교적 상징물, 선덕여왕을 신성화하기 위한 도구, 심지어는 신라의 높은 과학 수준을 상징하는 건물 등 여러 가지 설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과학이 덜 발달했던 고대에는 별을 살펴보고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옛 왕궁인 월성 북서쪽에 첨성대가 지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게다가 신라시대에는 오늘날처럼 별을 보는 것을 방해하는 전기와 고층건물이 없어서 평지에서 별을 관측하는 일이 가능했다. 근대화 이전 동서양 대다수 옛 천문대들이 도시 중앙에 있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마지막으로 첨성대를 오르고 내리는 일은 당대 숙달된 담당자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일제강점기 시절 무질서하게 첨성대를 올라간 학생들의 사진들이 이를 반증한다. 그래서 대다수 학자들은 여전히 첨성대를 천문대로 주장한다.
첨성대를 뒤로 하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오른쪽에 앙상한 가지들로 가득한 숲들이 있다. 바로 경주 김 씨 시조인 김알지가 탄생한 계림(鷄林)이다. 탈해왕 9년(65) 원래 이곳의 이름은 시림(始林)이었는데, 이곳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날이 밝아 호공(瓠公)이라는 인물을 보내 살펴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고. 사내아이의 이름은 금궤에서 나왔다고 김(金)씨, 이름은 알지라고 했다. 이후 ‘닭의 숲’이라는 계림으로 바뀌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계림 입구에는 순조 3년(1803)년에 세워 이를 기념한 비각이 있다.
그런데 계림의 진가는 김알지 설화로만 끝나는 게 아니다. 겨울철이라 잎이 없어서 그런지 다른 숲과 달리 줄기가 매우 굵직굵직한 것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특히 비각 왼쪽 편 무려 1,300년의 세월을 버티고 큰 그루터기가 남은 회화나무가 인상 깊다. 기록에 근거한다면 첨성대처럼 수많은 전란을 이겨내고, 무려 2,000년의 세월을 버텨온 숲이라고 해야 할까. 여름에 오면 이곳의 푸르름을, 가을에 오면 단풍이 절경을 이루는 경주 생태관광의 가장 중요한 명소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경주 흔적 - 경주 최 씨 교촌마을
2,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숲을 벗어나면 으리으리한 기와로 된 건물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마치 신라시대를 벗어나 조선시대로 가는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나. 숲길 마지막을 지나면 바로 앞에 대문이 하나 보인다. 현판에는 ‘경주향교(慶州鄕校)’현판이 뚜렷하게 보인다.
향교라면 고려와 조선시대의 국립 지방교육기관이다. 향교가 있는 지역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교동, 명륜동과 같은 지명으로 이어지는데, 경주향교 주변에 있는 마을의 이름도 교촌마을이 되었다. 그런데 경주향교는 다른 곳과 비교하면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통일신라 신문왕이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인 국학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향학으로 강등되었지만, 성종 23년(1492)에 경주 부윤 최응현이 중건하였다. 오늘날 향교는 임진왜란 이후 1600년부터 14년에 걸쳐서 재건되었다. 향교 뒤에는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앞에는 제향 공간인 대성전이 위치한 전묘후학 구조다. 지금은 전통체험과 제향을 하는 역할로 축소되었긴 했지만, 1,300여 년 옛 교육특구 역사의 위엄을 보여주는 터전이다.
향교 바로 왼쪽에는 상당히 으리으리한 집이 있는데, 우리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들었던 경주 최부잣집이다. 최부잣집에 들어가기 전 눈에 띄는 간판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토종 찹쌀로 빚은 300년 넘게 이어온 전통주이자 국가무형문화제 제86-3호인 경주교동법주다.. 그런데 정면으로 고풍스러운 집이 하나 보이는데, 7대 남강 최언경이 이조리(오늘날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지은 집이다. 이곳이 바로 교촌에서 가장 오래된 최부잣집 고택이다.
경주교동법주 오른쪽 집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큰집이다. 이곳은 바로 최언경의 손자 9대 최세린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지은 것이 오늘날까지 종가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 큰집 앞으로 후손들이 분가하면서 오늘날 교촌최씨마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종갓집답게 대문을 먼저 들어서면 바깥채가 나를 맞이 해준다. 바깥채에서 가장 눈에 띈 건 오른편 아래에 있는 정자인데, 외부 손님에 대한 예의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향교와 비교하면 상당히 작은 규모로 아담하게 지어졌는데, 이는 향교에 제향 된 선현들 앞에서 겸손함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바깥채 오른편에는 곳간이 하나 있는데, 보통 고택의 곳간은 모내기를 도입하여 수백 석의 쌀을 보관할 수 있는 만석꾼의 부를 상징한다. 하지만 여기는 상당히 특이한데, 1907년 경주국채보상운동 관련 자료들이 대거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최부잣집도 국가 빚을 갚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또한 만석꾼 최부잣집의 역사를 마감한 곳이기도 한데, 바로 후손인 최준 선생이 그동안 쌓은 부를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자금으로 해방 후에는 교육사업으로 전 재산을 바친 역사가 깃든 공간이기도 하다.
곳간 앞을 지나면 안채가 보인다. 안채를 들어가기 전 나무틀로 시야를 막아놓았는데, 최부잣집도 조선시대 후기 철저한 남녀 공간의 분리에 따라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채 중앙에는 옹기들이 중앙에 조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바깥채에 손님들이 오면, 안채는 이를 준비하느라 상당히 분주했을 광경이 떠오른다. 오늘날로 치면 중요한 미팅을 위해 상당히 분주하게 일하는 실무자들과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첨성대에서 교촌마을로 걸어오니 이런 느낌이 들었다. 계림을 통과하기 전 첨성대는 홀로 남아 신라 역사를 지키고 있었다. 반면 2,000년 역사의 계림을 통과하고 바라본 교촌마을은 신라 국학이라는 역사로 시작해서 여러 시대를 거쳐 살아남았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특히 경주향교 옆에 세워진 최부잣집을 보면 조선시대에도 경주는 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남겨진 첨성대를 보며 오늘날까지 신라의 영광이 전해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드물게 조선시대의 경주를 보여주는 교촌이 남아 있어서 위로가 된다. 그리고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항일 정신은 시대를 넘어야 하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