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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Jan 28. 2022

경주 동궁과 월지

통일신라 시절 화려했던 모습을 상상하며

경주에서 야경이 아름다운 곳을 꼽으라면 동궁과 월지라 할 수 있다. 화려한 불빛으로 치장한 3호 전각이 연못과 만나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풍경은 동궁과 월지의 최고 절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조명으로 장식된 전각과 함께 추억을 남기는 사진을 많이 찍는다.


나도 이전까지는 동궁과 월지의 아름다운 풍경만 봤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궁은 신라 태자의 거처, 월지는 인공연못이자 통일신라 왕실의 후원과 연회장이라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깊이 알고 싶었다. 통일신라시절 동궁과 월지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된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나라 중요 사적지로 일컬어지고 있는지? 여기에 대해 해답을 찾기 위해 나는 국립경주박물관을 찾아갔다.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


보통 사람들이 국립경주박물관에 오면 신라역사관과 왼쪽 건너편에 있는 특별전시관과 신라미술관을 관람하고 나온다. 하지만 오른쪽 건너편에 있는 월지관도 절대로 잊지 말고 가자. 특히 다음 코스가 동궁과 월지라면 더더욱. 동궁과 월지에서 발굴된 건축부자재와 공예품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연꽃무늬 수막새다. 잠깐 수막새가 뭐지? 먼저 동글동글하게 이뤄진 수키와들과 아래로 약간 휘어 있는 암키와들을 주목해보자. 그리고 수키와와 암키와 가장 앞부분을 보면 뭔가 화려한 문양이 있는데, 수키와 끝 원형 모양의 장식이 수막새, 암키와 끝 불완전한 반원형 혹은 삼각형으로 보이는 장식이 바로 암막새다. 통일신라시대는 다양한 연꽃무늬와 꽃무늬의 수막새와 당초, 봉황, 비천무늬 암막새들로 이뤄졌는데, 수수함을 추구했던 조선시대 기와보다는 더 화려한 느낌이 들었다.


기와의 명칭


다양한 문양의 수막새(좌)와 암막새(우)


용마루 양 끝에 달린 화려한 치미와 지붕 귀퉁이에 달린 용무늬기와도 인상 깊다. 치미는 지붕에 웅장함을 더하기 위해, 용무늬기와는 액운을 막기 위해 제작했다. 과학이 발달한 오늘 액운을 막는 옛 건축부재는 점점 사라졌지만, 왕실의 영원함을 기원하며 정성스레 제작한 장인의 혼은 여전히 남아있다.


용무늬기와(좌)와 치미(우)



2층으로 올라가니 동궁과 월지에서 발굴된 공예품들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내 눈에 띄었던 것이 육각형 8면, 사각형 6면, 총 14면체로 이뤄진 주사위다. 일단 보이는 면의 한자들을 보자.


금성작무(禁聲作舞): 노래 없이 춤추기

임의청가(任意請歌): 아무에게 노래 청하기

음진대소(飮盡大笑): 술 다 마시고 크게 웃기

추물박방(醜物莫放): 더러운 것을 버리지 않기


뭔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 오늘날 술 게임하다가 벌칙을 수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 주사위를 술과 관련된 명령을 내리는 도구라는 '주령구(酒令具)'라고 부른다. 통일신라시절 상류층들도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구나. 아니 오히려 벌칙이 우리 것보다 더 고약했던 것이 아닐까? 아쉽게도 박물관의 주령구는 복제본이다. 원래 주령구는 1975년 출토된 후 물기를 빼내기 위해 전기오븐으로 습기를 제거하다가 새카만 재로 남았다.


이렇게 수많은 신라의 비밀을 간직한 월지관을 미리 찾아오지 않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유물을 봐서 통일신라 시절 동궁과 월지의 상상해보며 다시금 깊게 관람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생겼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으니 옛 통일신라의 화려한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을 거고.


주령구 복제품


동궁과 월지


야간에 동궁과 월지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13년 전에 봤던 화려했던 것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수질개선을 위한 준설공사로 인해 물이 빠져 있었다. 그래도 2008년에 봤던 화려한 전기조명이 가득한 세 전각들은 그대로였다.


옛 신라시대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조명이 없던 시절 궁중에서 의전을 담당했던 관리들이 수많은 등화구들을 준비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특히 전각의 지붕을 자세히 보니 박물관에서 전시된 기와장식으로 다시 복원해 놓았다는 것을 이제야 볼 수 있었다. 그럼 동궁과 월지는 언제 지어졌을까? 삼국사기의 두 문구를 보자.


동궁과 월지 야경
3호 전각과 연못에 조성된 인공섬


二月, 宫内穿池造山, 種花草, 養珍禽竒獸

(문무왕 14년, 674) 2월(음력),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그리고 5년 후 음력 8월,


創造東宫, 始定内外諸門額號.

동궁을 짓고 처음으로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679년 동궁이 완공되었다? 그렇다. 이는 삼국통일전쟁이 끝나(676) 통일신라의 평화시대가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밤에 전각을 보니 전쟁의 시름에서 벗어난 왕이 게임에서 져서 귀족들 앞에서 체면 생각지 않고 주령구를 던진 다음 술 마시고 크게 웃는 모습이 상상된다.


하지만 동궁의 용무늬기와도 신라의 멸망이라는 큰 재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붕은 쓰러져가고 귀족들의 공예품과 액운을 막아주는 기와마저 땅 속으로 점점 사라져갔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안압지(雁鴨池)로 불렀는데,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기러기와 오리로만 가득한 연못으로 몰락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옛 통일신라 왕실의 영광은 1975년 발굴조사 때가 돼서야 다시금 드러났다.


월지를 유유히 헤엄치는 오리. 조선시대 이름인 안압지가 떠오른다.


박물관에서 화려했던 시절의 모습을 본 다음 동궁과 월지를 보니 13년 전과는 또 다른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주령구로 벌칙을 수행했던 통일신라 왕족과 귀족들은 서라벌의 가장 화려했던 연회장이 1,350여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재건될 줄 알았을까? 나아가 이런 생각도 든다. 오늘날 청와대 영빈관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그래도 조선시대와 달리 월지 주변에 단장이 잘 되어 있어 옛 모습이 점차 회복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감이 든다. 마치 문무왕이 처음 월지를 조성했을 때로 다시 돌아갔다고 해야 할까나. 봄에는 진달래꽃들이, 가을에는 단풍이 우리를 맞이한다.


또한 오늘날 옛 신라 상류층의 전유물에서 모두를 위한 경주시 야경 필수 코스로 탈바꿈했다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마치 전각을 비추는 수많은 전기조명처럼 흥망성쇠의 모든 것을 경험하다가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금 새로운 모습으로 일어설 수 있다는 내 마음의 소리와 같이.



봄꽃으로 가득한 4월 월지 풍경
동굴과 월지 복원 조감도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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