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탄생한 곳에 묻힌 박혁거세
신라 역사의 시작을 말하려면 경주 나들목을 나와 왼쪽으로 바로 보이는 오릉을 빼놓을 수 없다. 위로는 남천, 왼편으로는 형산강, 아래로는 남산이 오릉을 감싸 안고 있다.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그리고 그 후대 박 씨 왕들이 묻혀있기에 오늘날까지도 신라오릉춘향대제가 열리면 전국에서 오는 박 씨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오릉은 통일신라 이전의 신라고분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이뤄져 있다. 대릉원에 있는 크나큰 무덤들보다는 작지만 조선왕릉보다는 훨씬 더 크다. 그러면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은 박혁거세 시절부터 시작했던 것일까? 하지만 뭔가 미심쩍다.
또한 오릉이 다른 신라 왕릉과 비교해서 흥미로운 점은 박혁거세의 배우자인 알영 신화의 무대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덤 뒤쪽으로 알영이 태어난 우물인 알영정이 있는데, 여기 우물에 용이 나타나 옆구리로 여자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 입에 부리가 있었는데, 어떤 할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월성 북천으로 데려가서 목욕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져 고운 아이가 되었다고. 그런데 이것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박혁거세가 알을 깨고 나온 곳은 오릉 건너편에 있는 경주 나정인데, 박 씨 왕조 후손들은 오히려 알영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곳에 묻혔으니까. 아무래도 박 씨 세력 못지않게 알영도 지역에서 매우 잘 나갔던 가문이었던 것 같다.
신라와 박 씨 가문의 시작을 알려주는 오릉으로 찾아가 보자.
경주 나들목을 나오면 맞이하는 다섯 고분들
경주나들목을 나와 첫 번째 삼거리를 지나면 경주시내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좌회전을 하자마자 오른쪽 편으로 무덤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바로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그리고 이후 박 씨 왕들이 묻혀 있다고 추정하고 있는 오릉이다. 오릉 입구를 들어서면 신라오릉정화사업기념비가 있는데, 기원전 57년에 박혁거세가 서라벌을 건국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무려 2,000여 년 전의 일이다.
완연한 4월 중순 봄이라서 그런지 나무들이 매우 푸르렀다. 푸른 봄나무 숲을 지나면 작은 언덕처럼 생긴 능들이 보이는데, 바로 오릉이다. 다섯 릉에는 초대 혁거세 거서간과 알영부인, 2대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이사금, 5대 파사 이사금이 묻혀있다고 한다. 모두 초기 박 씨 가문 왕들이다. 능 앞에는 조선시대의 양식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무덤 입구를 알리는 숭의문과 제각이다. 숭의문은 내가 강릉 대도호부 관아에서 봤던 삼문형식으로 되어 있고, 제각은 가로 5칸의 건물로 되어 있는데, 추분 때 여기서 모든 박 씨의 시조를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본관과 관계없이 여러분이 만약 박 씨라면 여기에 참여할 수 있으니 참고하자.
앞서 오릉은 박 씨 다섯 왕과 알영부인이 묻혀있다고 언급했다. 이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른 것인데, 혁거세 거서간, 남해 차차웅, 유리 이사금, 파사 이사금 모두 사릉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사릉은 오릉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도 오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뭔가 섬뜩하다.
理國六十一年王升于天, 七日後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有大虵逐禁, 各葬五體爲五陵亦名虵陵, 曇嚴寺北陵是也. 太校子南解王継位.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국인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내쫓아 못하게 하므로 다섯 가지 신체부위(五體)를 오릉(五陵)에 각각 장사 지내고,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하늘로 올라갔다가 유해가 땅에 흩어졌다? 그래서 유해를 모으려고 했는데 뱀이 방해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유해가 나뉘었다는 불길함 때문에 그런지 이 무덤을 지키는 박 씨 가문에게 이 이야기를 되도록 언급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나는 혹시나 신라 귀족들의 연합체인 육부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에 대해 아직까지 학계에서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고고학계에서 오릉 발굴조사를 해볼 수도 있겠지만, 모든 박 씨들에게 시조의 신성한 역사가 깃들었기 때문에 함부로 다루면 안 될 일이다.
오릉도 시내에 가까운 천마총, 황남대총처럼 능이 작은 언덕처럼 되어 있다. 이를 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하는데, 먼저 땅을 원형으로 평평하게 한 다음 원형의 가운데에 목곽을 놓는다. 다음에는 목곽 주변과 상부에 일정한 높이로 돌을 쌓은 다음 봉분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계단식 피라미드처럼 생긴 돌무지무덤과는 다른 신라만의 독특한 양식이다.
신라 초기의 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은 돌무지무덤과 달리 오늘날에도 도굴이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안에 있는 수많은 돌들 때문에 짧은 시간에 도굴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간에 무덤을 파서 도굴을 하다가는 안에 있는 수많은 돌이 도굴꾼의 머리에 쏟아지기에 시도할 엄두도차 내지 못한다. 오늘날에도 돌무지덧널무덤을 발굴 조사하려면 봉토를 없앤 다음 돌들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치워야 해서 엄청나게 고생한다고 한다.
그런데, 오릉은 원래부터 돌무지덧널무덤이었을까? 대다수 학자들은 신라 초기에는 널무덤이 유행했다고 한다. 널무덤은 국사시간에 철기시대 수업에서 나오는 내용인데, 장방형의 구덩이를 파고 시체를 묻는 양식의 무덤이다. 이는 이후 목관과 목곽을 추가해 시체를 묻는 형태로 진화하는데, 박혁거세 시대 신라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아무래도 왕실 무덤도 예외가 없었을 터.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3권 눌지 마립간(19년) 편에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다.
二月, 修葺歷代園陵. 夏四月, 祀始祖廟.
“[19년(435년)] 2월에 역대 원릉을 수리하였다. 여름 4월에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눌지왕은 김 씨 왕조의 세 번째 왕이다. 눌지왕 기준으로 선대 군주는 미추 이사금, 내물 이사금(한국사 교과서는 주로 내물 마립간으로 언급)과 실성 이사금이다. 아무래도 선대 이사금들의 왕묘 수리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데, 역대 원릉이라는 말 때문에 세 기 밖에 없는 김 씨 선대 왕릉만 수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4월에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사도 의미심장하다.
대다수 학자들은 눌지 마립간이 왕권을 강화하면서 박 씨 왕들의 무덤도 마립간 시대의 대표적 형태인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재정비하여 오늘날까지 이른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조묘는 남해 차차웅이 설립하였고, 이후에 박 씨, 석 씨, 김 씨 왕들이 성 씨와 상관없이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조묘 제사는 소지마립간 9년에 시조의 탄생지인 나을에(오릉 건너편에 있는 나정을 말한다.) 신궁을 설치한 후 시조묘를 대체할 때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시조릉이 박혁거세 설화가 깃든 나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박혁거세 부인의 설화가 깃든 알영정 옆에 있다. 가부장 체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오늘날의 시선으로 봐도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럼 알영 가문도 신라 건국에 큰 공헌을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릉을 뒤로하고 알영정으로 가기로 했다.
알영정과 숭덕전
알영정 주변에는 꽃들이 알록달록 피어있었다. 그리고 알록달록 한 꽃 뒤로 담장이 보이는데, 알영정 안에 들어가는 문이 닫혀 있어 아쉽게도 알영정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멀리서 비각이 하나 보였는데, ‘신라시조왕비탄강유허(新羅始祖王妃誕降遺墟)’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 예전에 월성원전 근처에서 본 석탈해탄강유허비와 비슷한 형태다. 즉 이곳에서 알영이 태어났다는 의미. 알영 설화는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嫗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 能内輔, 時人謂之二聖.
“5년(B.C. 53) 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났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 노구(老嫗)가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성장하면서 덕행과 용모가 빼어나니, 시조가 그 소식을 듣고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행실이 어질고 내조를 잘하여 이때 사람들이 그들을 두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다.”
예전에 봤던 석탈해 설화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아이가 태어나 노인이 키웠고, 행실이 어진 자로 성장했다는 내용. 삼국유사도 마찬가지로 알영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추가된다. 아이가 태어날 때 입술이 닭 부리와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북천에 가서 목욕을 시키니 입에 있던 부리가 떨어졌다고 나왔다고.
또 차이나는 점 하나가 삼국사기에서 알영이 태어난 때는 박혁거세 5년(B.C. 53). 박혁거세가 13세에 즉위했다고 하니, 혁거세와 알영과의 나이차가 무려 18살이나 차이가 난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박혁거세가 나정에서 흰 말 한 마리가 알을 남기고 하늘로 올라가자 박혁거세가 알을 깨고 나온 후 바로 알영이 태어난 내용이 나온다. 즉 삼국유사에서 혁거세와 알영은 동갑내기다. 이후 혁거세와 알영은 13세에 결혼한다.
학자들은 신화를 해석할 때 신라는 외부에서 이주한 혁거세 가문과 당대 잘 나갔던 서라벌 토착 세력인 닭토템을 가진 알영 가문과 혼인으로 연결되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부부 모두 행실이 어질어서 그런지 두 성인(二聖)이라고 불렸다고. 아무래도 알영도 탄생 이후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신라 기틀을 잡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이 아닐까? 또한 박혁거세의 서라벌 정착을 도운 토착세력이었으니 여기에 박 씨 왕들이 묻힌 것도 당대에서는 자연스러운 전통이 아니었는가 싶다.
일부 학자들은 알영의 알(閼)이라는 한자 때문에 김알지를 시조로 삼는 김 씨 가문과 연관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눌지왕이 나정이 아닌 알영정에 시조묘를 정비한 것이 설명이 된다. 다만 닭토템이 아닌 용토템이라고 반박하는 학자도 있어 확실치는 않다.
알영의 탄생이 깃든 곳을 뒤로하면 사당같이 보이는 곳이 하나 있는데, 오늘날 혁거세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인 숭덕전이다. 초기 신라시대부터 이어진 전통은 오늘날 숭덕전 제사로 이어진 셈이다. 건물은 세종 11년(1429)에 세웠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서 선조 33년(1600)에 재건한 것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오릉을 신성한 장소로 여겼다는 증거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다만 숭덕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지난번 울진에서 봤던 평해황씨시조제단원처럼 시조를 기념한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특정한 날에 박 씨들만 들어갈 수 있다. 무덤 앞 제각에서 추분 때 제사를 지내듯이 여기는 춘분 때 신라오릉보존회에서 숭덕전 춘향대제를 성대히 봉행하고 있다. 조선시대 시절에는 중앙에서 파견한 예관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다가 경종대에 이르러 박 씨 가문에서 참봉 3명을 두었다. 이후 주로 박 씨 문중에서 주관하여 봄, 가을 제사를 지내는 방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만약 독자 여러분이 박 씨이고 전통제례에 관심이 있다면 춘분과 추분에 오릉에 오는 것을 잊지 말자.
신라 초대 왕들이 묻혀 있는 오릉. 초기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와 오늘날까지 이곳은 신성한 곳으로 이어졌다. 이는 신라 초기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조선시대 국가에서 제사를 주관했다는 점이 증거가 된다. 오늘날에는 신라오릉보존회가 이 전통을 잇고 있고, 춘분과 추분이 되면 수많은 박 씨 사람들이 이곳을 참배하러 온다.
박 씨가 아닌 나에게도 오릉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신라의 기원이 되는 곳. 그리고 건너편 나정과 알영정이 서라벌대로를 중심으로 북서-남동으로 마주 보고 있다. 알영정에 박 씨가 문들이 묻힌 것을 보면 알영 가문이 박 씨 왕조의 서라벌 정착을 도운 것인가? 그래서 그런지 오릉 아래로는 초기 아달라 왕과 신라 후기 박 씨 왕들이 묻힌 지마왕릉, 배동삼릉과 경애왕릉도 있다. 시내에 있는 김 씨 왕릉과 달리 박 씨 왕릉은 남산 주변으로 있다.
다만 혁거세 부인인 알영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후대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아 나로선 아쉬울 뿐이다. 그래도 알영정에 시조릉을 남긴 것과 두 성인이라고 칭송받은 것을 보면 신라 건국에 큰 역할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남편과 함께 신라의 기틀을 잡은 알영부인도 같이 추모하며 오릉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