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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우 Sep 25. 2022

단양 온달산성

죽령 이북 회복의 꿈을 이루지 못한 온달 이야기가 깃든 단양 영춘면

단양읍내에서 남한강 상류방향을 따라가는 59번 국도와 522번 지방도로 가다 보면 영춘면에 도착하게 된다. 영춘면은 단양읍과 영월읍의 중간 지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영춘면사무소에서 남서 성산(城山) 427m 정상부에 적성에서 봤던 비슷한 양식의 삼국시대 산성이 있다.


산성의 이름은 사적 제264호 온달산성. 우리가 아는 그 바보 온달의 이름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온달이 아단성을 되찾아오겠다고 하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온달산성은 아단성의 유력한 후보지 중 하나로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산성 아래에는 드라마 세트장과 온달동굴로 이뤄진 온달 테마공원이 있다.


과연 단양 영춘면이 온달이 마지막 일생을 바친 곳일까? 영춘면 성산 정상에 있는 온달산성과 그 일대를 한 번 찾아가 봤다.


사적 제264호 온달산성


단양읍내에서 59번 국도를 타고 남한강 상류를 따라가다 보면 군간교가 나온다. 거기서 522번 지방도를 따라 우회전하자. 계속 가다 보면 영춘면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영춘교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꺾으면 온달테마공원으로 갈 수 있다. 읍내에서 차로 약 25분 정도 걸린다.


온달테마공원에 들어서면 두 갈래 길이 보이는데, 서편으로는 온달산성, 동편으로는 온달테마공원으로 갈 수 있다. 여기에서 온달산성을 왕복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50분. 나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오는 산성을 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서 왼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왕복 50분이라면 어렵지 않은 산행길이라고 생각했다.


등산로가 나무계단으로 이뤄져 있어 산을 오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계단의 끝이 안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한 20분쯤 올라가서인가 체력이 달려서 그런지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휴게소에서 금방 올라갈 수 있는 적성보다는 난이도가 조금 높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가쁜 숨을 몰아쉰 끝에 드디어 해발 427m 정상부에 있는 온달산성에 다다랐다. 400m가 넘는 정상에 산성을 쌓아서 그런지, 영춘면과 남한강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의 돌은 네모난 석회암 돌을 다듬어서 면과 모를 맞춰서 쌓았는데, 적성의 형태와 비슷하다.

       

온달산성 올라가는 길. 정상부까지 나무계단이 끝도 없을 것처럼 이어져 있다.
온달산성의 성벽. 네모난 석회암 돌을 다듬어서 면과 모를 맞춰 촘촘하게 쌓았다.
온달산성 일대. 해발 427m 산 정상을 타원형으로 둘러싼 테뫼식 산성이다.


또한 이곳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토기 조각이 발굴되어서, 대다수 학자들은 온달산성을 쌓은 나라가 신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가 남한강 상류를 따라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그리고 북쪽에서 침입해오는 고구려군을 감시하기 위해 남한강 일대의 깎아지른 절벽을 활용해 산 정상에 방어기지를 쌓았음을 한 번에 알 수 있는 현장이다.


그럼 온달은 신라가 쌓은 산성을 공격하다가 여기서 최후를 맞은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학계마저도 서울의 아차산성과 단양 온달산성 두 곳으로 의견이 나뉜다. 이에 대한 논란은 삼국사기의 온달 열전의 다음 문구 때문에 그렇다.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

드디어 가서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웠는데, [온달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


위의 아단성을 어디로 비정하냐에 따라 갈리는데, 단양 온달산성을 지지하는 경우 영춘면의 옛 지명인 ‘을아단(乙阿旦)’이었다는 것과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초기에 평양발 죽령길을 따라 김화-화천-춘천-원주-제천으로 남진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온달이 계립령과 죽령 이서를 찾으려고 했던 점과도 맞닿아 있다. 참고로 온달은 영양왕의 매부다. 온달의 아내 평강공주는 왕의 동복누이고.       

 

온달산성에서 바라본 영춘면 일대. 영춘면 앞에 흐르는 강이 남한강이다. 신라는 산성을 거점 삼아 동강이 흐르는 영월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가 방어선을 워낙 잘 구축해서 단양 사람들은 이곳에서 온달이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온달을 장사 지내려고 했지만 관이 움직이지 않아 아내인 평강공주가 “삶과 죽음이 이미 정해졌으니 돌아가시지요(死生㳏矣, 於乎歸矣.)“라고 하니 그제야 관을 들어 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리고 매부를 잃은 영양왕도 매우 슬퍼했다고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기록했다.


온달이 전사한 곳은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신라가 이곳에 산성을 쌓은 것은 당시 전황으로 봤을 때 그야말로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영춘면은 삼국 말기 남한강 상류지역과 강원도 영서 산간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신라의 중요한 군사거점이었다. 죽령 너머 있는 적성과 온달산성은 5세기에서 6세기까지 한강을 둘러싼 고구려-신라 간 치열한 각축전을 잘 보여주는 곳이 아닐까?


온달산성 북문터, 문 좌우로 망루처럼 돌출된 사각형 형태의 치(雉)가 있다.


온달테마공원와 온달동굴


이제는 평화로운 영춘면 전망대로 된 온달산성을 뒤로하고, 온달테마공원으로 향했다. 테마공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로 중국식 고택과 궁궐로 이뤄졌다. 연개소문, 태왕사신기, 천추태후 등의 드라마 촬영지였기 때문이다. 주로 연개소문 드라마를 중심으로 하여 세트장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눈에 띈 곳은 ‘강도의 이궁 연회장’을 촬영한 곳이다. 수 양제는 고구려 원정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양쯔강 이남 양주 강도에 이궁을 세워 주색잡기로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결국 우문화급과 우문지급 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양제의 허리띠를 풀어 황제를 교살하게 된다.    

  

드라마 연개소문 '강도의 이궁' 촬영지. 수 양제는 강도의 이궁에서 우문화급에게 죽임을 당했다.


재미있게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수나라에게 대패를 안겼던 시기가 영양왕 후반기다. 그렇다면, 온달테마공원은 온달 사후 고구려-중국의 정세를 드라마 세트장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평강공주가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면, 바보 온달과의 만남부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까지 바라본 파란만장한 고구려 후기 역사의 증인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천추태후 드라마에서 궁궐로 촬영했던 조원전과 연개소문 촬영지인 양현감과 당 고조 이연 저택을 지나면 동굴이 하나 보인다. 천연기념물 제261호 온달동굴. 아무래도 온달산성 근처에 있어서 이런 이름을 붙이지 않았나 싶다. 조선시대에 발간한 <신증동국여지승람> 영춘현 기사에도 이 동굴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아래와 같다.


城山。在縣南三里。鎭山。下有石窟,高丈餘,廣可十餘尺許,深入無際厓。有水混混而出,深可沒滕,淸冷如氷。


성산(城山): 현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어 높이가 11척 남짓이고, 넓이가 10여 척쯤 되며, 깊숙이 들어가 끝이 없고 물이 철철 나와 깊이가 무릎에 닿는데, 맑고 차갑기가 얼음과 같다.


성산에는 이름 그대로 온달산성이 있다. 그 아래 석굴이 있다는 말인데, 이곳이 바로 오늘날 온달동굴이다. 실제 동굴을 들어가 보니 물이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오늘날에는 철제 통로가 있어서 물이 닿지 않지만, 흐르는 물을 보니 조선시대 기록과 다름없다. 또한 동굴이 남한강변에 가까워서 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동굴의 수위도 비례해서 올라간다.


한강물이 자주 드나들었던 관계로 일생을 동굴에서만 사는 생물(진동굴성 생물)들을 찾을 수가 없는 것도 특징이다. 물론 석회 동굴답게 곳곳에 종유석과 석순들과 석회석의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진 온갖 조형물들도 있다. 석회동굴을 관람하고 출구를 나서면 온달 전시관이 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온달 열전을 자세히 알고 싶으면 한 번 관람해보자.


드라마 천추태후의 조원전 세트장(좌)과 당 고조 이연의 저택 촬영지(우)
온달 동굴 입구. 오늘날에도 조선 시대의 기록처럼 물이 철철 흐르고 있다.
온달동굴은 석회동굴이다. 그래서 사진에 보이는 종유석과 석순, 석주 등이 있다.


옛 조선 영춘현. 오늘날 단양군 영춘면에는 바보 온달의 최후의 결전지로 알려진 온달산성이 있다. 산성은 신라가 남한강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영서 산간지방을 지배하기 위한 거점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산성 위를 올라가서 영춘면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위치 선정이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산성 아래에는 고구려와 전쟁을 치렀던 수·당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세트장과 조선시대부터 전해지는 온달동굴도 있다.


영춘면 일대가 온달이 최후를 맞이한 곳인지는 아직 논쟁 중에 있다. 게다가 공주의 간청으로 온달의 유해가 평양으로 돌아간 후, 고구려는 수나라와 전쟁을 치르느라 계립령과 죽령 이서의 지역을 영영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아직도 영춘면 여러 장소에 남아 있다. 어쩌면 고구려 충신 온달이 못다 이룬 한을 후세들이 기리기 위함이 아닐까?


온달테마공원을 나서면 온달의 일생을 그린 온달관이 있다. 단양 사람들은 영춘면 일대가 온달의 마지막이 깃든 곳이라 믿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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