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경이 조선시대부터 사랑받은 이유
단양에서 가장 유서 깊은 관광지라면 도담삼봉, 석문, 옥순봉, 구담봉,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으로 이뤄진 단양 팔경을 꼽을 수 있다. 강원도의 관동팔경처럼 조선 시대 문인들과 화가들은 단양의 팔경을 보고 수많은 시와 문학작품과 그림들을 남겼는데, 퇴계 이황,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단양 팔경은 내가 준비했던 관광통역안내사 시험에도 기출이 많이 되어서 여덟 곳을 반드시 외워야 했을 정도다. 하지만 내가 말은 들어봤어도 단양팔경을 직접 가본 적은 없었다. 만천하 스카이워크와 같이 단양에 새롭게 떠오르는 관광지와 화려한 석회석 작품의 향연으로 이뤄진 고수동굴이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왜 단양 하면 여전히 팔경을 먼저 떠올릴까?
이번 기회를 통해 나는 팔경을 전부 살펴보기로 했다. 팔경을 보려면 도담삼봉부터 시작해서 단양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옥순봉, 구담봉, 그리고 단양천과 남조천에 있는 명승들까지 감상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 만에 보려면 상당히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도담삼봉과 석문
먼저 단양팔경 중 으뜸으로 알려져 있는 도담삼봉과 석문을 보기로 했다. 명승 제44호 도담삼봉은 단양읍내에서 삼봉로를 타고 차로 5분 정도 북서방향으로 가면 나온다. 맑은 날에 보니 푸른 남한강 위에 세 바위가 상당히 위용 있고 선명하게 보인다.
그런데 삼봉(三峰)이라. 누군가가 떠오른다. 혹시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과 도담삼봉과 인연이 있는 걸까? 원래 정도전은 봉화군 지방 향리 집안 출신인데, 단양에 기거했던 이유는 정도전의 외가가 있어서 그렇다. 조선 초기만 해도 여성이 친정으로 가서 아이를 낳는 풍습이 있어서, 정도전이 단양에서 유년기를 보낸 건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담삼봉과 관련된 일화도 전해지는데, 원래 삼봉은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이 홍수 때 떠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매년 정선은 단양에 부당한 세금을 요구했다고. 이를 들은 어린 정도전이 정선군수에게 “우리가 삼봉을 떠내려 오라 한 적은 없다. 오히려 물길이 막혀 피해를 보니, 정선군이 도로 가지고 가라”라고 말했다. 이후 단양에서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하지만 정도전이 ‘삼봉’이라는 호를 쓴 걸 보면, 어린 시절 이곳을 생각하며 짓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도담삼봉을 뒤로하면 정면으로 언덕을 올라가는 곳이 있다. 수많은 계단을 뒤로하고 가니 바위로 된 거대한 문이 보이는데, 명승 제45호 단양 석문이다. 두 기둥 위로 거대한 바위 구름다리가 지나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석문이 이렇게 세워진 이유는 석회동굴이 붕괴될 때 남은 천정의 일부가 거대한 구름다리 문처럼 남았기 때문이다.
석문 가운데를 들여다보니 남한강과 건너편 보이는 도담행복마을이 거대한 바위 액자 속에 있는 느낌이다. 조선시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바위 구멍이 문과 같아서 바라보면 따로 한 동천(洞天: 신선이 사는 별천지)이 있는 것 같다고 적어놓았다.
상류 쪽에 도담상봉과 석문을 감상하면 이제는 하류를 따라 내려가야 한다. 단양 서쪽 끝에 또 다른 명승인 구담봉과 옥순봉이 있기 때문이다.
구담봉과 옥순봉
구담봉과 옥순봉을 온전히 보려면 장화나루에서 충주호유람선을 타는 것을 추천한다. 충주호유람선을 타려면 읍내로 다시 나와 영주 방향으로 5번 국도를 타고, 북하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고불고불한 36번 국도를 따라가서 오른편에 보이는 유람선 선착장으로 가야 한다. 유람선은 상류로 제비봉까지 잠시 거슬러 올라간 다음, 구담봉과 옥순봉으로 내려와 옥순대교에서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코스로 되어 있다.
유람선을 타니 마치 남한강이 좌우 산들의 호위를 받고 아래로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충주호가 있기 전에는 오히려 수위가 낮아 기암절벽이 모래사장 위로 더욱 두드러지게 보였을 것이다. 구담봉을 만나기 전에는 제비가 날아오르는 형상의 봉우리로 이뤄진 제비봉, 신선이 내려오는 곳이라고 알려진 강선대 바위를 지나면, 단양군 서쪽 끝에 있는 구담봉과 옥순봉을 만날 수 있다.
명승 제46호 구담봉. 물속에 비친 바위가 거북이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워낙 경치가 빼어나서 그런지, 이황, 이이, 겸재 정선과 같은 시인과 화가들이 빼어난 절경을 보고 수려한 시문과 그림을 남겼다. 조선 인종 때 백의재상이라 불린 이지번이 낙향하여 칡넝쿨을 구담봉 양쪽 봉우리에 걸어 타고 다녀서 신선으로 불렸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있다.
구담봉을 지나면 또 다른 절경인 명승 제48호 옥순봉이 나온다. 옥순의 의미는 구슬과 죽순이라는 의미인데, 퇴계 이황이 단양산수가유자속기(丹陽山水可遊者續記)에서 봉우리를 깎아 세운 것이 높이가 천 백장이나 되는 대나무 순 같고, 그 빛이 푸르기도 하고 창백하다고 해서 직접 지은 이름이다. 특히 산봉우리 왼쪽 아래 두 개 기둥이 마치 이곳에서 좀 더 가면 단양이 시작한다고 알리는 관문처럼 생겼다(현재 옥순봉은 제천시 수산면 관할이다).
남한강에 있는 도담삼봉, 석문, 구담봉, 옥순봉을 감상하면 이제는 내가 갔다 왔던 단성면 옛 단양 좌우 하천을 따라가야 나머지 4경을 볼 수 있다. 왼편 단양천을 따라서는 상, 중, 하선암이, 오른편 남조천을 따라서는 사인암이 있다.
상·중·하선암과 사인암
먼저 단양천을 따라 하선암부터 상선암까지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옥순봉과 구담봉처럼 봉우리와 같이 생겼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하선암이라는 표지를 보고 계곡에 들어선 순간 그렇지 않음을 직감했다. 오히려 계곡물에 큰 너럭바위들이 가득한 곳인데, 바위들을 자세히 보니 한자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옛 선인들의 방문 흔적인데, 문화재보호법이 없었던 시대의 유산이라고 해야 할까.
중선암과 상선암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계곡에 흐르는 물 좌우로 크고 작은 바위가 선인들의 한자들이 새겨진 채로 잘 진열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특히 중선암의 경우 옥렴대에 한자가 크게 새겨져 있는데, 아래와 같다.
四郡江山 三仙水石 崇禎九十年丁酉秋觀察使尹憲柱書
사군의 강산이 아름답고 삼선의 수석이 빼어나다. 숭정 90년 정유년 가을에 관찰사 윤언주가 썼다.
사군은 제천, 영춘, 청풍, 단양을 말하고, 삼선의 수석은 상, 중, 하선암을 말한다. 숭정 90년은 서기로 환산하면 1717년. 윤언주가 충청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새긴 글이다. 31년 뒤 그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상선암에서 다시 가산 삼거리로 내려가 곧장 가서 직치재와 피티재를 넘으면 또 다른 하천인 남조천이 보인다. 남조천을 따라 왼쪽으로 꺾어 조금만 가다 보면 우리가 한국화에서 흔히 본듯한 깎아지른 석회암 절벽과 정상의 소나무들이 절벽의 위용을 뽐내준다. 여기가 바로 명승 제47호 사인암이다.
고려시대 유학자 역동 우탁이 사인(舍人: 고려시대의 관직 중 하나)으로 재직할 때 여기에 머물렀다는 내용이 있어서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였던 임재관이 이를 기념하여 이곳을 사인암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사인암 암벽에 새겨진 가장 유명한 문구는 아래와 같은데, 주역의 제28괘 택풍대과 문구를 인용했다. 사인암의 존재감을 잘 보여주는 문구라고 해야 할까나.
卓爾弗群 確乎不拔 獨立不懼 遯世無憫
뛰어난 것은 무리에 비할 것이 아니며 마음이 확고하여 꿈쩍하지 못한다. 홀로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에 은둔하여도 근심함이 없다.
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의 관광홍보물을 보면 ○○8경, ○○12경과 같은 문구가 흔하게 보인다. 워낙 이런 문구가 많아 이젠 너무나 진부한 홍보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내 고장의 명물을 어떻게든 알리기 위한 지자체의 치열한 노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단양에 있는 팔경은 옛 문인과 화가들이 오랫동안 사랑했던 곳이어서 그 결을 달리한다. 조선 사대부들이 팔경을 보고 시와 기(記)를 많이 남겼는데, 정사에 지친 이들을 위한 휴양지였다고 과언이 아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일상에 지쳐 있다면, 여름 계곡과 남한강 좌우로 있는 절경들이 가득한 단양의 팔경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