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을 함께해온 제천의 명승
제천(堤川). '둑의 내'이라는 의미다. 고구려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내토군'이었는데, 순우리말로 하면 냇둑이라 오늘날 지명은 이를 뒤집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둑의 하천이라는 이름답게 제천 시내 북쪽에는 큰 저수지가 하나 있는데, 적어도 천 년은 훨씬 넘었다고 추정되는 의림지다. 김제 벽골제와 밀양 수산제와 함께 한국에서 오래된 저수지 중 하나인데, 의림지는 두 저수지와 비교할 때 오늘날에도 농어촌공사의 관리 하에 있는 현역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게다가 옛날부터 워낙 유명한 저수지여서 그런지, 의림지를 기준으로 호서지방이라는 명칭이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옛 조선 사대부들과 현대인들의 여가 장소로도 명성이 높다. 조선 후기 남인들의 제천 16경에 대한 시문으로 시작해서 의림지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과 호수 주위로 산책을 하는 제천 시민들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제천의 상징이자 유서 깊은 저수지인 의림지로 가보자.
적어도 천 년의 역사가 있는 저수지
의림지는 중앙고속도로 제천 나들목에서 가깝다. 나들목에서 내린 다음 38번 국도 영월방향으로 약간 가다가 첫 번째 나들목에서 제천북로를 따라 가자. 도로를 계속 가다 보면 의림대로가 교차하는 사거리가 나오는데, 좌회전하고 조금 가다 보면 의림지를 볼 수 있다. 해 질 녘 의림지에 도착하니 제천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도시 수변공원에 온 기분이라고 할까, 제천 시민들에게도 소중한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림지를 들어가면 가장 눈에 띄는 섬이 보인다. 수련과 수초 순채가 많이 자라서 명명된 순주섬이다. 원래 순채가 많이 있다가 안타깝게도 1972년 대홍수로 인해 안타깝게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니는 뭍에서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의림지 물오리들이 쉴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순주섬에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때는 1년에 딱 한 번인데, 바로 의림지 얼음축제 때다. 섬이 어떻게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저수지 준설 시 나온 흙을 쌓아서 만들었다는 설, 저수지의 수심을 측정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 음양의 조화를 위해 인공섬을 축조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의림지는 그럼 언제부터 조성되었을까? 고구려 시대 제천의 옛 이름은 내토(奈吐)군이었는데, 우리말 냇둑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삼국시대 전에는 둑방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축조시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삼한시대에, 어떤 이는 조선시대 기록을 인용해 신라 진평왕 시대 가야금으로 유명한 우륵이, 어떤 이는 지질학 조사를 바탕으로 9~10세기경에 축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늦어도 1000년은 넘은 저수지라서 상당히 오래된 곳임에는 틀림없다. 의림지는 해발 320m에 있는데, 870.1m 용두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용두산 물길로 인해 홍수가 잦아서 오늘날 해발 100여 m 아래에 있는 제천 일대를 보호하기 위한 둑방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논농사 기술이 발전하면서 해발 20~30m 아래에 있는 청전을 위한 관개수리용 저수지로 진화했는데, 다른 고대 저수지와 달리 오늘날까지도 농어촌공사의 관리를 받고 있다. 조선시대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아래와 같이 적혀 있는데, 오랫동안 제천 농경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義林池。在縣北十里。其深不測,灌漑甚廣。
의림지. 현 북쪽 10리에 있다. 그 깊이가 헤아릴 수 없고, 관개하는 것이 대단히 넓다.
의림지 누정과 야간 미디어 파사드
의림지를 걷다 보면 최근 조성한 인공폭포와, 오랜 역사가 있는 용추폭포 그리고 누정 셋이 있다. 먼저 인공폭포를 지나면 유리전망대가 내 발밑에 있는데 이 밑에 용추폭포가 흐르고 있다. 의림지에서 모여든 물은 용추폭포를 거쳐 하소천에 합류하게 되는데, 저수의 배수기능을 담당하고 20m~30m 아래에 있는 논밭에 물을 공급하는 특이하고 오래된 인공폭포라고 할 수 있다. 폭포 좌우의 암벽은 저수지의 토사유출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유리전망대를 지나자마자 누각이 하나 보이는데, 현판에 경호루(鏡湖樓)라고 적혀 있다. 광복 이후 1948년에 제천군수 김득연, 서장 김경술의 발기로 지어졌다. 경호루를 지나면 애국지사 이범우 선생의 추모비가 있는데, 제천 3.1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추모비가 세워진 이유는 의림지 표지석을 지나 보이는 영호정(映湖亭)을 1954년에 재건했기 때문이다. 원래 조선 순조 7년(1807)에 이집경이 세운 것인데, 6.25 전쟁 때 파괴되어 다시 짓게 된 것이다.
또한 정미의병 당시 제천을 중심으로 강원도, 충청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약한 이강년과도 연관이 있다. 제천 천남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곳 영호정에서 부하 장수들과 정치를 논했고,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사양했다. 정미의병부터 3.1 운동까지 연결고리가 있는 상당히 중요한 정자다.
영호정을 지나 길가에 있는 농어촌공사의 수질관리 및 안전점검 실명제를 볼 수 있는 시설물을 지나면 또 하나의 정자가 보이는데, 현판에 우륵정(于勒亭)이라고 적혀 있다. 제천시가 비교적 최근인 2007년에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것을 기념하여 지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심지어 우륵이 의림지를 축조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의림지 누정은 오늘날 3개소밖에 남지 않았지만, 조선시대 옛 기록에는 의림지 주변으로 의림정, 후선정, 우륵당, 폭포정 등 수많은 누정들이 있었다고 한다. 17~18세기 전반에 남인 계열의 사대부들이 의림지 주변의 절경을 중심으로 글과 시를 지었다고 하니, 적어도 350여 년 전부터 의림지가 치수시설을 넘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여가 명소로 거듭났음을 잘 보여준다.
폭포를 보고 누정을 감상하니 벌써 날이 어두컴컴해졌다. 저녁을 먹고 7시 50분에 다시 의림지를 거닐었는데, 오후 8시에 인공폭포에서 미디어 파사드가 있기 때문이다. 인공폭포를 병풍 삼은 화려한 조명쇼라고 해야 할까? 특히 조선 후기 산수화가 이방운이 그린 <의림지도>를 재해석한 영상이 인상 깊었는데, <의림지도> 중앙에 나오는 고깃배를 탄 어부를 의림지의 물고기와 잘 조화시켰다. 이 외에도 미디어 파사드는 의림지를 수호하는 십이지신과 용과 며느리바위에 얽힌 전설도 보여준다.
오늘날 제천 제1경으로 꼽는 의림지. 해발 320m에 놓인 산곡형 저수지 물은 용두산의 물을 막는 둑방에서 20~30m 아래에 있는 청전을 적시는 관개시설로 진화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남인 사대부들의 누정 역사부터 오늘날 인공폭포, 용추폭포 유리전망대와 미디어 파사드로 이어지는 여가 공간이다.
게다가 오늘날에도 농어촌 공사가 관리하니 적어도 1000년이 넘는 현역임을 과시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제천 시민들이 이곳에 나와 산책을 하는 것을 보면, 먼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으로 저수지를 설계했던 선조들의 혜안을 느낄 수 있다. 요즈음 생태를 강조하느라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어찌 보면 의림지가 이를 대표하는 사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