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수호 정신이 깃든 영원산성과 은혜 갚은 꿩이 전설의 배경지 상원사
해발 1,288m 높이의 원주 치악산(雉岳山). 가을이 되면 단풍이 매우 아름다워 옛날에는 적악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은혜 갚은 꿩의 전설로 인해 오늘날 이름에 꿩 치(雉) 자가 남았는데, 해발 1,180m 남대봉 아래 상원사가 배경이다.
하지만 치악산은 중원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군사요충지이기도 했다. 특히 이를 대표하는 것이 치악산의 영원산성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궁예가 석남사를 근거로 주변 고을을 공략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고려시대에는 원나라 반란군 카다안(哈丹賊)을 얼마 안 되는 병력으로 사수한 원충갑의 일화가 전해지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 요리 모시나리(森吉成)와 맞서 싸우다 전사한 원주목사 김제갑과 그의 아들이 전사한 항전지이기도 하다.
옛 호국선열의 수호 정신이 깃든 영원산성과 치악산 전설로 유명한 상원사를 가보자.
호국선열들의 수호 정신이 깃든 영원산성
영원산성은 치악산 금대분소와 가깝다. 금대분소는 수도, 강원 북부권에서는 중앙고속도로의 남원주 나들목에서 내려서 단구동을 통과한 다음 신림 방향으로 5번 국도를, 영남, 호남, 충청권에서는 중앙고속도로 신림 나들목에서 내려서 원주 방향으로 5번 국도를 타면 된다. 원주와 신림 방면에서 5번 국도를 가다 보면 금대 삼거리가 나오는데, 삼거리에서 금대분소로 올라가는 길로 가면 된다.
이제 슬슬 가을이 다가와서 그런지 산 정상 부분에 형형색색의 단풍 흔적이 보인다. 영원산성을 따라 길과 동행하는 봉천에는 다리가 놓인 곳마다 바위 위에 수많은 작은 돌탑이 쌓여 있는데, 산행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의미일까? 계곡물과 주위를 둘러싸는 나무들과 조화를 잘 이룬다.
한 30분을 걸었나. 큰 바위가 보이는데 한자로 ‘치악산 영원사(雉岳山 鴒願寺)’라고 적혀 있는데, 절이 가까움을 알리는 신호다. 좀 더 가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위쪽으로 올라가면 영원사 대웅전과 부속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모습은 1990년에 무이 스님이 중건한 것인데, 원래는 신라시대 때 지어져서 조선 중기까지 이어져오다 법통이 끊긴 것을 1939년 이계호 스님의 중건과 1960년 중수로 힘겹게 이어온 사연이 있다.
영원사에서 다시 내려와 다리를 지나면 왼쪽 편에 나무데크 계단이 보이는데, 사적 제447호 영원산성으로 가는 길이다. 이정표는 600m라고 써져 있지만, 경사가 가파른 계단이 끝도 없이 나와 숨을 헉헉 거리게 된다. 계단을 어느 정도 가니 앞에 돌로 쌓은 매끈한 성벽이 보이는데, 동쪽 벽을 1997년에 일부 복원해서 그렇다.
험준한 산 능선에 돌을 쌓아 계곡을 감싸는 포곡식 산성인 영원산성.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사기에 신라 신문왕 때에 북원경에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치악산에 다른 산성도 있어 이곳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후삼국시대가 태동할 때 궁예가 치악산 석남사를 근거로 주변 고을을 공략했다는 기사가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 언급되는데, 영원산성 일대를 배경으로 활동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의 반란세력인 카다안이 원주까지 남하한 일이 있다. 이때 원주 별초에서 무관으로 활동한 원충갑이 영원산성 일대에서 100명도 안 되는 적은 병사로 카다안을 크게 무찔렀다. 이로 인해 원충갑은 무려 6계단이나 승진하여 삼사우윤이라는 벼슬을 받아 승승장구했다. 뿐만 아니라 원주도 도호부를 거쳐 목으로 승격되는 경사를 누리게 되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는 왜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가 관동지방을 거쳐 원주까지 진격했다. 이때 원주목사였던 김제갑이 왜군과 맞서 일부 무찔렀지만, 군사력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과 아들 김시백, 부인 이 씨와 순절한 안타까운 역사가 있다. 김제갑은 원충갑과 함께 오늘날 충렬사에 제향되어 있다.
영원산성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선조들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시설을 잘 구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복원한 옛 남문과 망대 그리고 낮은 담장으로 몸을 보호하는 여장의 흔적도 남아 있는데, 망대를 보면 산 아래가 잘 보이는 위치에 잘 구축해놓았다. 망대에서 일정 구간을 지나면 반듯하게 복원한 성벽에서 오랜 풍파를 겪어 울퉁불퉁한 것으로 변화함을 볼 수 있다.
산성의 동쪽 끝 부분에 다다르니 아래로 원주시내가 전망대에서 훤하게 보여 지친 몸을 달래준다. 실제로 이곳에는 성벽 일부를 외부로 내뻗어 몸을 가릴 수 있도록 쌓은 담인 용도(甬道)의 흔적이 있었는데, 매복하며 정찰하기 딱 좋은 지형이기도 하다.
상원사와 은혜 갚은 꿩 이야기
영원산성 끝에서 능선을 타고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면 삼거리가 보인다. 왼쪽으로 가면 해발 1,041.8m의 향로봉, 오른편으로 가면 해발 1,180m의 남대봉으로 가는 길인데, 치악산 전설의 배경이 되는 상원사를 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향했다.
남대봉을 가기 전에 사방이 확 트인 종주능선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 앞쪽으로는 가을이 시작되었다고 알리는 치악산 자락의 수많은 봉우리와 원주 시내가 훤히 보이고, 뒤쪽으로는 횡성군 부곡리가 한눈에 들어와 고단했던 몸을 풀어지는 느낌이다.
전망대를 지나 한 10~20여분 내려가면 1,180m 남대봉 표지석을 볼 수 있다. 남대봉을 지나면 이제 치악산 전설을 간직한 곳으로 내려가는 무수한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다 내려간 후 왼편으로 가면 드디어 기암절벽 위에 수수한 흰 전통 건물로 가득한 상원사가 보인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오늘날 건물들은 6.25 전쟁 때 폐허가 된 것을 1968년 주지 송문영과 의성이 중건한 것이다.
상원사를 들어가기 전 오른편 깎아지른 벽 위에 있는 범종각과 소나무가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마치 무언가 사연이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하긴 그러고 보니 치악산과 얽힌 전설이 생각난다. 바로 은혜를 갚은 꿩의 전설인데, 옛날 어느 한 나그네(혹자는 치악산에서 수행했던 승려라고도 한다)가 치악산 기슭을 지나던 중 새끼를 품고 있는 꿩을 감아 죽이려는 큰 구렁이를 보았다. 아무래도 이를 측은하게 여겼는지 나그네는 지팡이로 구렁이를 쳐서 꿩을 구하게 된다(화살로 쏴 죽였다는 전승도 있다).
그날 저녁 나그네는 여인 혼자 사는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갑자기 여인이 구렁이로 변신하여 나그네를 위협하였다. 구렁이로 변신한 여인은 나그네에게 폐사가 된 상원사의 종을 세 번 울리면 살려주겠다고 했는데, 나그네의 지팡이 때문에 죽은 남편 구렁이를 승천시키기 위함이었다.
구렁이의 위협 때문에 나그네는 정상 가까이에 있는 상원사에 도달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절에서 갑자기 종이 세 번 울렸는데, 구렁이는 이를 듣고 다시는 나그네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았다. 나그네가 정신을 차리고 상원사로 올라가니 종루 밑에 꿩과 새끼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즉 꿩과 새끼들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나그네에게 자기 몸으로 종을 쳐서 목숨으로 은혜를 갚은 것이었는데, 붉은 단풍으로 가득한 적악산에서 꿩 치(雉) 자가 들어간 오늘날의 이름으로 바뀐 이유다.
원주의 진산(鎭山)이자 가을에는 단풍 명소로 유명한 치악산. 치악산 남대봉 아래에 있는 상원사는 구렁이의 위협에서 구해준 나그네에게 은혜를 갚은 꿩의 전설로 유명하다. 꿩들이 목숨을 걸고 나그네를 구했기에 오늘날 그들을 기린 이름으로 내려오고 있다.
꿩뿐만 아니라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이들의 영혼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몽골 반란군 카다안의 위협에 맞서 싸운 원충갑과 임진왜란 때 원주목을 사수하다 목숨을 바친 김제갑 가족들이 있었으니까. 이번 가을에 단풍을 보러 치악산에 올 일이 있다면 은혜를 갚은 꿩과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순국선열을 추모하며 남대봉 일대를 올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