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은행나무가 말해주는 천년의 이야기
양평에서 가장 높은 해발 1,157m의 용문산. 경기도에서 네 번째로 높은 곳 아래에는 산과 이름이 같은 용문사와 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자리 잡고 있다. 천 년 고목답게 높이는 42m, 뿌리 부분 둘레가 약 15.2m인데, 사찰보다는 은행나무가 오히려 명성이 높아 가을만 되면 고목과 함께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용문사도 원래는 천 년이 넘은 역사가 있는 걸로 추정하고 있지만, 영주 부석사와 달리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건물은 없다. 조선 초기에도 용문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몇 백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정약용은 절의 쇠락함을 안타까워했다. 게다가 구한말에는 인근 지평면처럼 의병이 이곳에서 항쟁한 것 때문에 일제가 절을 불태워버리는 만행을 저질렀고, 6.25 전쟁 때 용문산 전투로 또 불타 80년대가 되어서야 간신히 모습을 찾았다.
고된 시련을 몸소 경험한 천년 은행나무가 있는 양평 용문사로 가보자.
용문사 은행나무
서울과 경기 북부권에서 용문사는 주말에 외곽으로 나들이 가기 좋은 곳이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용문역에서 내린 다음 옛 용문터미널로 나와 용문사행 버스로 환승하면 된다(다만 매월 5, 10, 15, 20, 25, 30일은 용문 장날이니 용문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가야 한다.).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있고, 용문사까지 20분 정도 걸린다.
충청, 영남이나 호남에서 출발한다면, 중부내륙고속도로 남양평 나들목에서 양평읍내를 거친 다음, 6번 국도를 타고 마룡 교차로까지 가자. 이후 341번 지방도를 따라 조현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용문천을 따라 직진해 쭉 올라가면 된다.
이번에 내가 용문사를 가는 건 두 번째인데, 어릴 때 기억과 달리 상당히 많은 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한자와 한글로 쓰인 시가 담긴 비문들과 주변을 감싸고 있는 소나무들로 가득하다. 무엇보다 2015년에 조성된 양평의병기념비와 용문항일투쟁기념비가 눈에 띄는데, 이곳도 지평면 못지않게 항일의병들의 전장이었나 보다.
양쪽 기둥마다 용머리가 있는 일주문이 용문사로 들어가는 길임을 알려준다. 일주문에서 한 15분 남짓 걸었나. 오른편으로 나를 정화시켜 줄 사천왕문이 용문사에 다 왔음을 알려준다. 사천왕의 인도를 받고 계단을 계속 올라가면 왼편으로 커다란 고목 한 그루가 보인다.
고목은 바로 용문사의 명물인 천연기념물 제30호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무려 천 년 동안 이곳에서 터줏대감 노릇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을에 노란 은행들로 가득하여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미 철이 지나서 그런지 낙엽을 다 벗은 채로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90년대 초등학교 시절 봤던 나무가 아닌 것 같다. 알고 보니 2001년 고사 위기에 처해 가지치기를 한 것. 조치를 한 이후에는 60m에서 40m로 높이가 낮아졌다. 가지치기를 하기 이전에는 은행이 무려 20석이나 가까운 은행을 수확했지만 지금은 5석으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벼락 피해를 막기 위해 피뢰침을 설치했다.
이를 보니 마치 이곳의 뭐든 것을 아는 연로하신 어르신을 모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은행나무가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용문사 대웅전으로 발길을 향했다.
용문사 이야기
그럼 용문사가 언제 처음 지어졌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봉은본말사지>에 의하면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처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혹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이곳에 친히 행차하여 손수 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 초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용문사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龍門寺。在彌智山。山之稱龍門以寺。寺有李穡《大藏殿記》。
용문사(龍門寺): 미지산에 있다. 산을 용문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절 때문이다. 절에 이색의 대장전기(大藏殿記)가 있다.
용문산의 옛 이름은 미지산. 미지는 용의 순우리말인 ‘미르’로 추정하고 있다. 이색에 대장전기에는 우왕 4년(1378) 정지국사 지천이 개풍 경천사의 구씨원각대장경을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오늘날 남아있지 않다). 정지국사 지천이라. 그는 무학대사와 함께 공민왕 시절 원나라에서 유학했다. 두 승려 모두 인도에서 온 지공대사와, 그의 제자이자 고려인이었던 나옹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고려로 돌아온 뒤 동기인 무학대사는 태조 이성계와 친분을 쌓아 출세의 길을 걸었지만, 지천은 정반대로 자취를 감추고 수행에만 힘썼다.
이후 천마산 적멸암에서 입적하였는데, 화장을 하니 어마어마한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지혜라는 의미를 가진 ‘정지(正智)’라는 시호를 태조가 내렸다고 한다. 실제 그를 기념한 승탑과 비(보물 제531호)가 용문사 북동쪽 야트막한 산에 있는데, 그의 생애가 적힌 비석은 보존처리를 위해 특수한 천으로 덮여 있었다. 제자들이 이곳에 그를 추모한 것을 보면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가 용문사가 가장 융성한 때가 아닐까 싶다. 육각형 건물인 관음전에 있는 보물 제1790호 금동 관음보살 좌상도 고려 후기에 제작되었으니까.
하지만 태종 이후 숭유억불 기조가 강화된 후, 용문사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조선 후기 용문사를 찾은 정약용의 시구를 보면, 화려했던 고려시대의 위용이 사그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용문의 보찰이 폐허에 버려져 있어라 / 龍門寶刹委殘墟
객이 이르니 빈 산에 목탁 소리만 들리네 / 客到山空響木魚
옛 전각엔 평중의 잎새¹⁾가 누렇게 비추고 / 古殿照黃平仲葉
황량한 대엔 무후의 채소²⁾가 새파랗구려 / 荒臺寒碧武侯蔬
세조가 하사한 것은 은주발이 남아 있고 / 光陵內賜餘銀盌
고려의 불교 문화는 옥섬돌에 보이누나 / 麗代宗風見玉除
어찌하면 처자식의 거리낌을 털어 버리고 / 安得擺開妻子戀
설천에 눌러앉아 성인의 글을 읽을거나 / 雪天留讀聖人書
주1) 평중의 잎새: 평중은 은행나무의 또다른 이름이다.
주2) 무후의 채소: 무후는 삼국시대 촉 나라 승상 제갈량을 뜻한다. 위나라 북벌 중 장기전에 돌입할 때 제갈량이 병사들에게 순무를 심을 것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순무를 제갈채로 부르기도 한다.
정약용 사후에는 더한 시련을 겪었다. 구한말 양근과 지평(양평은 이 두 지명이 합쳐진 이름이다.)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용문사에서 항쟁한 것을 빌미로 일제가 사찰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간신히 재건되는 듯했으나, 용문산이 1951년 중공군 춘계공세를 방어하기 위한 전장으로 되어, 또다시 불에 탄다. 절은 8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중건되었는데, 내 앞에 있는 대웅전과 지장전과 거의 모든 건물들이 이에 해당한다.
양평의 고찰 용문사와 천연기념물인 은행나무. 가을철이 되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와 은행잎으로 가득한 고목을 사진에 담는다. 처음 고목을 볼 때는 그의 위용에 반하지만, 그 위용 뒤편으로는 조선 시대의 용문사의 쇠락, 일제의 만행과 한국전쟁의 시련이라는 주름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만 간신히 살아남고 함께 있던 건물이 불탄 모습을 본 고목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도 시련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21세기에 들어서는 고사 위기에 처해 상당히 많은 부분이 가지치기당했다. 그리고 옆에는 피뢰침이 나란히 있다. 그리고 피뢰침 뒤로 대웅전 앞에 있는 석가탑이 함께 눈에 띄었다. 마치 부처의 자비와 과학의 힘이 천년 은행나무를 영원히 보호할 것처럼. 이 둘의 힘으로 용문사와 은행나무가 다시금 시련을 겪지 않길 바라며 길을 나섰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