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R
“오늘은 3반과 축구 시합이 있을 예정이다.”
20년 전 어느 교실의 점심시간.. 반장의 비장한 말 한마디에 교실의 분위기는 월드컵을 앞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과 같았다. 매일 쉽게 볼 수 있는 아수라장 같은 운동장에서 이공 저공 할 것 없이 차고 노는 공놀이가 아닌 정식적으로 할당된 체육시간에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우리반과 3반 선수들끼리 자존심을 걸고 외나무다리에서 펼치는 시합을 앞두고 있었다. 심판은 체육 선생님께서 봐 주시기로 했다.
쉬는시간에 우르르 칠판 한쪽에 모여 분필로 그라운드를 그리고 포지션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전담 골키퍼에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각 포지션별 최적의 선수를 선발하였다. 하지만 감독은 없었다. 의견이 서로 다를 때에는 난장판이 되곤 했다. 하지만 여기 모여 있는 모두의 목적은 우리반의 승리와 영광 그 하나였기에 결국 우리는 화합하여 최상의 라인업과 전술을 짜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포지션은 응원 단장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경기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양팀 모두 무작정 공격만 하는 동네축구 전술이 아니었기에 서로의 골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아쉬운 시간이 지나가고 양팀의 탄탄한 수비를 감안하였을 때 한 골만 넣으면 이길 수 있다는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상대편의 최전방 공격수가 86년 멕시코월드컵의 마라도나로 빙의 하여 골문 앞으로 환상적인 드리블을 한 후 슛을 날렸고 우리반의 수비수는 골대 바로 앞에서 가까스로 걷어 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슛이 골 라인 아웃 되자 마자 상대편의 모든 선수들은 심판을 보고 있던 체육선생님께 달려와서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한쪽 손들 들고 다른 손으로 들고 있는 손을 탁탁탁 치며 외쳤다.
“핸들!! 핸들!!”
“손으로 쳐냈어요!! 손!!! “
수비수가 골대 앞에서 발이 아닌 손으로 걷어 냈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우루과이와 가나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8강전에서 수아레스가 도미니크 아디이아의 헤딩슛을 손으로 걷어낸 사건과 같은 그림이었다. 그런데 심판의 표정이 이상하다. PK를 선언하는 것도 아니었고 단호하게 경기를 계속 진행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아마 잠시 딴 생각을 하였는지 순간 그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심판이 PK판정을 하지 않았으니 우리반 선수들은 그대로 경기를 진행하려 하였지만 상대편 선수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아니 선생님!! 수비수가 손으로 공을 걷어 냈다니 까요!! PK 차야지요“
“아니죠 선생님!! 원래 심판이 못 봤으면 그대로 진행 되는거 아닌가요?”
“저 수비수에게 물어보세요. 손으로 걷어 냈는지 안냈는지!!”
“아니, 심판의 판정도 경기의 일부 아닌가요? 심판이 안 불었으면 끝 아닌가요?”
“야 니 솔찍히 말해라. 손으로 걷어 냈나. 안냈나.”
“심판에게 물어봐라. 그걸 왜 나 한테 묻노?”
운동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고 불합리한 심판 판정이라며 이대로 경기 보이콧을 선언하려고 하는 3반 선수들과 심판의 판정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우리반 선수들 사이에는 더이상 경기 진행이 불가능해 보였다. 결국 심판이었던 체육 선생님은 사건의 당사자인 슛을 날린 공격수와 슛을 막은 수비수를 따로 불러서 이야기했다.
“니 손으로 걷어 냈나 안 걷어냈나?”
“선생님, 그건 심판이 보고 판단하는 데로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 양심적으로 말해봐라. 공이 니 손에 맞았나 안 맞았나.”
“…”
수비수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니 점마가 손으로 안쳐냈으면 진짜 골 들어가는 거였나?”
“네!! 점마가 손 안 댔으면 그냥 진짜 들어 가는 거였어요.”
공격수는 진심을 다해서 거의 울먹이는 듯 억울함을 어필했다.
양팀 당사자의 말을 다 들어본 심판은 결국 PK를 선언했다. 우리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고 격렬한 항의를 쏟아냈다. 심판의 판정 번복이라는 전래가 없는 상황을 받아 드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심판의 표정은 단호했다. 몇 분 전 까지만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던 그 심판이 아니었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 나서는 마치 정의의 편에서 약자를 대변하는 듯한 굳건한 표정이었다. 심판의 판정은 오로지 심판의 권한이고 번복이 불가능 하다고 심판이 못 봤으면 핸드볼이 아니지 않냐고 맞는 말인지 틀린 말인지 모르는 얕은 지식을 총 동원하여 설득해 보지만 심판이 핸드볼 순간을 보았는지를 떠나서 진실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며 PK를 인정했다.
결국 PK는 성공하였고 경기는 그대로 마무리되었다. 경기 종료와 함께 상대팀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우리 선수들에게는 나라를 잃은 듯한 억울함과 분노만이 가득 했다. 경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체육선생님에게 원망 어린 한탄을 쏟아냈다.
“아니. 선생님. 세상이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그로부터 20년 후 ···.
“골~~!!!! “
2018 러시아 월드컵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를 보기 위해 시청 앞 과장을 찾은 아내와 나는 후반전 막바지에 터진 김영권의 골에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뿐이겠는가. 시청 앞 광장이 떠나갈 듯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우리가 독일을 상대로 선취골을 넣다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세레머니를 하며 달려가는 김영권 선수의 앞에 부심의 오프사이드 깃발이 올라가 있었다.
“오프사이드??”
“보자 보자. 다시 보자.“
“돌려봐 돌려봐!! VAR”
시청 앞 광장에 모인 수만명이 하나같이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리면서 다시 보자고 외쳤다. 시대는 변했고 더 이상 심판의 말에 절대 복종이란 없다. 비디오로 확인하지 않고 서는 믿지 못한다. 전광판으로 나오는 느린 화면에서 독일 수비수의 발에서 시작된 패스라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모두가 오프사이드가 아니라는 확신에 또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골~~~”
모두의 예상 대로 심판은 판정을 번복하고 골을 선언했다. 태극전사들은 다시 세레머니를 하였고 시청 앞 광장에 모인 우리는 또 한번 환호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있기에 심판의 판정 번복에도 독일 선수들은 항의할 수 없었다.
“와!! 여보. VAR 없었으면 어떨 뻔 했노.”
“그러니까!! 옛날에는 심판 말에 무조건 절대 복종했어야 했는데···.”
아내의 질문에 답을 하던 그 순간, 20년 전 VAR 없이 양심에 따라 수많은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직 진실한 결과를 위하여 판정을 번복했던 체육선생님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