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린이 다이어리 59
"넌 참 대단하다."
달리기에 빠진 뒤 지인들에게 듣곤 하는 말이다. 2년 넘게 매일 아침 달리고 있으니, 남들 눈에는 독한 사람으로 보이나 보다. 나 역시 예전에 달리기에 빠진 선배를 보고 그런 생각하며 동경의 눈빛으로 쳐다본 기억이 있다.
내가 꾸준히 달리기를 할 수 있었던 주 원동력은 즐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함께 매일 아침 달리게 만들었던 강박도 큰 역할을 했다.
달리기를 하면서 나는 꾸준히 달려야만 하는 이유를 만들었고, 그 믿음을 강화시켜 왔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부상으로 인해 내가 갖고 있는, 아니 내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 잡은 강박에 대해 한번 되짚어 보게 되었다. 최근 들어 일부 강박을 깨기도 했지만, 지금도 마음속에 깊게 뿌리내려 자리 잡은 강박도 있다.
우선, 달리기는 운동이 끝날 때까지 쉬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일산호수공원을 달리며 배가 아프던지, 운동화 끈이 풀려서든지 잠시라고 멈추면, 그걸로 그날 달리기는 망쳤다며 짜증스러웠다. 아마도 처음에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조금 더 오랜 거리를 달리기 위해 스스로 '절대로 멈추면 안 된다'며 독려해서 그런 것 같다. 자꾸 힘들다고 멈추면 걷고 싶어 지니깐, 그래서 최소 1km, 최소 일산호수공원 1바퀴, 최대 10km 등은 쉬지 않고 달려야 운동을 제대로 하는 거라 믿었다. 그러다가 한 손에 구글맵을 켜고 새로운 장소를 달리면서 길을 찾기 위해, 스스로 관광모드로 달리면서 구경을 하기 위해, 때로는 앞에서 소개했던 모네프로젝트를 위해 잠시 멈춰 서서 사진을 찍기 위해 달리다가 멈추기 시작했다. 비록 달리지는 않더라도 서서, 걷는 등 몸은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깐 괜찮다 싶었다.
두 번째, 늘 심박수를 최대로 전력에 가깝게 달려야 했다. 유산소 운동(심박수 136~154 bpm)의 영역을 넘어, 무산소 운동(155~173 bpm) 더 나아가 최대 심박수 운동(174~193 bpm) 수준까지 심박수가 오르도록 달렸다. 항상 내가 부담 없이 달릴 수 있는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나와의 인내심 싸움을 해가며 달렸다. 예를 들면 10km/h 속도가 내가 편하게 달릴 수 있는 속도였다면, 11km/h, 12km/h가 편해지도록 힘써서 달려 버릇했다. 그래야 운동이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실은 달리기 능력을 늘리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매일같이 그렇게 달리다간 몸에 무리가 갈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지금은 10km/h로 일산호수공원 1바퀴를 30분에 달린다면, 9km/h로 더 긴 시간을 달리는 것도 하나의 지구력 훈련이라고 믿는다.
달리기에 관한 서적을 읽으면, 지구력과 스피드를 동시에 향상하기보다는 편한 속도로 달리는 시간을 늘리고, 그 시간이 적응이 되면 속도를 늘리는 방법을 권하기도 한다. 그래야 몸에 무리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속도와 시간을 동시에 늘리는 방식으로 연습을 해 왔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래서 오히려 내 한계의 벽을 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일산호수공원을 달리면서 5km의 벽을 넘기가 힘들었다. 온 힘을 다해 5km를 달리고 더 달리려 하는데 이미 내가 지쳐 여유가 없었다. 5km를 넘는 순간 최소한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안도감에 발걸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5km의 벽을 넘어서는데 위해 1년이 걸렸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던 나의 연습 방식이 오히려 큰 벽을 만들었다.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편한 속도로 달리며 거리를 늘렸다면 정체기가 길지 않았을 것 같다. 실제로 내가 태어나서 10km를 쉬지 않고 달렸을 때가 잊히지 않는다. 눈 온 다음날이었다. 눈 때문에 미끄러울까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어차피 속도를 못 낼 거 편하게 10km를 달려보자며 달렸고, 그렇게 일산호수공원 2바퀴를 달려 10km를 달렸다. 그리고 오른발 족저근막염으로 달리기를 쉬게 되기 전까지 천천히 달려도 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세 번째, 운동은 하루라도 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달리기를 하면서 살이 빠지고, 체력이 늘었다. 달리기를 통해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스스로 느끼고 있다. 그러니 하루라도 운동을 쉬면 어렵게, 힘들게 쌓아온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다. 하루 운동 안 하면 다시 살이 찌면 어떡하지? 하루 운동을 쉬면 어렵게 쌓은 체력, 근육에 힘이 빠지면 어떡하지? 하루 운동을 건너뛰면 기껏 향상해 놓은 심폐지구력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루 운동을 쉬고 나면 앞으로 운동을 하기 싫어지면 어떡하지? 이 같은 불안함이 매일같이 운동을 하도록 나를 밀어붙였다. 의사로부터 족저근막염 증상이 없어질 때까지 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전거, 걷기 등 대체 운동을 고민했지 그냥 쉴 생각은 추호도 안 했다.
그랬는데, 최근에 두통으로 인해 강제 휴식에 들어갔다. 그래서 푹 쉬고 있다. 그런데 오른발 상태가 좋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의사가 쉬라는 말이 이렇게 쉬라는 거구나 싶었다. 언제까지 운동을 쉴까? 그리고 다시 달렸을 때, 걱정했던 것보다는 체력이 잘 유지되고 있었다.
네 번째, 잠시라도 쉬면 조금씩 교정해 놓은 달리기 폼이 다시 돌아갈 것 같았다. 달리기를 하면서도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이는 것보다 상체를 수직으로 세운다는 느낌으로 달리는 것이 한결 몸이 가볍다. 그리고 보폭을 좁혀 발에 충격이 가지 않는 자세로 달렸었다. 그렇게 내가 편하게 달릴 수 있는 자세를 만들어 갔다. 어렵게 자세를 만들어 놓고, 일주일 이상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그 동작을 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그렇게 멍청하지 않았다. 내가 꾸준하게 고민하고 연습한 만큼 그 미세한 동작이 몸에 밴다. 그래서 잠시 쉬었다고 쉽사리 잊지 않는다. 그래서 꾸준한 연습이 중요하다 하나보다. 다시 달리기 시작하면 금방 느낌을 찾곤 한다.
다섯 번째, 운동은 새벽에 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실 저녁 약속이 많은 업무 성격에 맞춰 새벽에 운동을 했다. 동시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새벽잠이 없어지기도 했다. 새벽에 운동을 하면 또한 일산호수공원에 사람이 없어 여유롭게 달릴 수 있었다.
평일에는 아침 출근 시간을 단축하고 빠르게 출근할 수 있었다. 회사 내 복지시설로 피트니스가 있었다. 아침에 가면 운동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쾌적하게 운동을 할 수 있다. 운동을 하고 나서 샤워를 하고 여유롭게 사무실로 올라가면 됐다. 지각 걱정 없이, 차 막히는 시간을 피해서, 아침 운동까지 하니 일석삼조였다. 하지만 그렇게 새벽 운동만 고집할 필요가 있었을까? 요즘 들어 생각이 바뀐다. 바쁘거나, 전일 술약속이 있었다면, 아침에 쉬고 저녁 시간에 좋은 컨디션으로 달리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날이 좀 풀리면 저녁 시간에도 달리러 나가볼 생각이다.
더 나아가 아침에 운동을 빼먹고 한 시간 더 자고 출근하면 차가 엄청 막힐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일산에서 회사인 김포까지 새벽 시간에 가며 30분이면 간다. 5시에 나가서 5시 30분에 도착, 1시간 운동하고 씻고 사무실에 가는 루틴이다. 그런데 운동을 쉬고 1시간 늦게 나가면 차가 엄청 막힐 것이라고 믿었다. 최근 운동을 쉬면서 출근시간을 늦췄다 평소보다 5분~10분 정도만 더 걸렸다. 내가 유난히도 이른 시간에 움직이긴 한다. 그런데 1시간 늦게 출근해 보니, 걸리는 시간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여섯 번째. 혼자 달려야 운동이 제대로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난 2년 이상을 혼자 달렸다. 성격상 동호회에 가입해서 새롭게 사람들 친해지거나, 새로운 룰에 얽매이기 싫었다. 그리고 마음 편하게 내 페이스대로 달리고 싶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누군가와 같이 달려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 지루하고 누군가와 달림으로써 더 친해질 계기가 생긴다. 그리고 서로 격려도 해줄 수 있다. 내가 달리기로 느끼는 즐거움과 긍정적인 효과를 함께 누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슬금슬금 같이 달리고 싶다고 와이프를 꼬시는 중이다. 올해 봄에는 넘어올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에서 언급한 강박들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실 안 지킨다 해도 크게 무너지는 것은 없다. 하지만 하나라도 안 지키면 지금껏 쌓아왔던 것을 사라질 것 같았다. 문제는 강박을 지켜야 한다고 믿는 것이 나를 더 옥죄었다.
지금은 부상 때문에 잠시 멈춰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있다. 그제야 나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강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달리는 것이 아니다.
즐겁게 오래도록 달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