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노도 필요한 감정입니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일리아스 1권 1행
일리아스의 첫 문구이다. 이 짧은 문구만으로도 아킬레우스라는 한 사람의 분노가 어떤 일들을 일으켰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잔혹한 분노’라는 표현만으로도 그 심각성이 느껴진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다는 그의 분노는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까?
아카이오이족 진영에 역병이 돌고 그 원인을 조사하자 아가멤논의 잘못으로 드러났다. 그가 전리품으로 얻은 아폴론 사제의 딸은 돌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신을 달래기 위해 사제의 딸을 돌려보내야 했고, 그는 대신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인 다른 여인을 빼앗게 된다. 이에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전쟁이 한창인 시기에 전투 불참을 선언한다. 이는 엄청난 전력 손실로 이어지고 많은 그리스 병사들을 죽음에 빠뜨렸다. 심지어 지금껏 자신들 진영 근처에 오지 못하던 트로이 병사들이 자신들이 타고 온 배들 옆까지 침투하게 되는 일마저 벌어진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빌려 입고 그 인척 하며 참전하다. 트로이인들을 아카이오이족 진영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즉,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분노로 책임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사랑하는 전우인 파트로클로스를 잃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모두 아킬레우스의 분노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전투가 불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랑하는 친구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몇천 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나쁜 결과를 부르기에 분노는 참아야 한다고 말한다. 분노도 하나의 감정일 뿐인데 유독 금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노의 사전적 의미는 ‘몹시 분하게 여겨 심하게 화를 내는 것’이다. 이것은 감정의 한 종류로 ‘화’보다 더 크고 다양하며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다. 연관 검색어를 살펴보면 ‘분노 조절, 분노 장애, 분노를 다스리는 10가지 방법’ 등이 나오고, 추천되는 광고도 대부분 심리, 정신 상담 관련 업체들이다. 이것만 보아도 충분히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또한 서로에게 좋지 않은 상황을 가져다준다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다스리고 억눌러야 하는 것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이처럼 우리는 분노를 위험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 경향은 최근 몇 년간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의 영향으로 더욱 커졌다. 순간적인 분노로 타인을 다치게 하거나 죽인 사건들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고, 범인들은 하나같이 그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분노가 사건의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그 자리는 더욱더 공고해졌다. 그리고 전문가와 언론들이 ‘분노 조절 장애’라는 표현을 자주 언급함으로써 범주를 벗어난 존재로 비쳤다. 이렇듯 좋지 않은 일들과의 관계가 반복되면서 도덕적 기준이 부여되고 나쁘고 잘못된 감정으로 인식되어, 결국 ‘분노=표출해서는 안 되는 감정’으로 박제되었다. 분노를 표출하는 순간 자신은 분노 조절 장애 환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분노도 때로는 필요한 감정이다. 예를 들어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같은 경우이다. 이런 일에는 화나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분노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그것을 억누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은 생각과 행동처럼 분리될 필요가 있다. 모두가 생각한 대로 행동하지 않듯이 감정 또한 느끼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은 달려가서 범인에게 욕을 하고 때리고 심지어 피해자의 가족이라면 죽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흔한 계란 세례도 받지 않았으니 말이다.
우리의 분노는 '국민 청원'이라는 제도를 통해 표출되었다. 운영자와 그것을 이용한 회원들의 신상 정보 공개를 요구하고 철저한 수사를 요청하는 청원에 수십만 명의 국민들이 동참하여 분노의 힘을 보여줬다. 이 외에도 몇 년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에 대해 함께 분노했고 그것을 촛불 시위라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소하였다. 또한 음주 교통사고로 친구를 잃거나 스쿨존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법제화를 통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즉, 분노했지만 지혜롭게 그 마음을 드러냈다.
이렇듯 분노라는 감정 자체에는 아무런 잘못도 선악도 없다. 오히려 그것을 표출하는 방법이 미숙한 것인데 그 둘을 하나로 생각한다. 폭력적이지 않게 드러낸다면 무조건 다스리고 억눌러야 하는 대상은 아닐 것이다. 또한 분노 때문에 저질렀다는 범죄의 원인을 하나의 덩어리로만 분석하기 위해 선택된 표현(분노 조절 장애)도 쉽게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분노에서 도덕적 잣대를 걷어 들이고 적절한 방법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나의 분노가, 우리의 분노가 서로에게 안 좋은 일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새로운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음을 상기시키자.
이성적 사고가 정답인 현대 사회에서 감정은 자꾸 억눌려가고 있다. 특히 슬프고 괴롭고 화나는 감정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자리 잡혀가는 것이 안타깝다. 경쟁 사회에서는 나약한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되기 때문이겠지만 이런 감정들을 안으로 삼키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도 함께 잃어가고 있다. 그 표현법을 잃었기에 분노에 대한 오해가 생기고 그 자체를 감정이 아닌 악의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분노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면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참기만 하다가 순간적으로 폭력을 취할 수 있기에 해소하는 적절한 방법을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한 사람의 분노가 사회적인 일이 될 수 있는 만큼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가멤논의 행동으로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표현법은 분명 잘못되었다. 엄연히 전쟁 중인데 참여하지 않는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끼쳤으니 말이다.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면 파트로클로스도 잃지 않았을 것이고 더 큰 명예를 얻어 진정 영웅다운 모습을 보였을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