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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벤다허브 Jul 23. 2022

3. 설득에도 요령이 필요합니다

일리아스를 읽으며 수다를 마누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는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상기된 억양과 짜증이 묻어나는 고객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속으로 큰 호흡부터 내뱉는다. 나의 잘못은 없지만 “죄송합니다”를 남발해야 하고 고객의 불만 사항이 어떠하든 그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몸짓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평이라는 불화살을 온몸으로 막아내면 녹초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고객이 나의 설득을 받아들여 감정이 해소된다면 그나마 행운이다. 억지를 부리고 논리가 통하지 않는 상대는 안하무인이 되어 나의 하루를 망치기 일쑤이다. 상담사로 일하면서 불만이 있는 고객을 접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행히도 이리저리 치이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노하우도 쌓이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득의 3요소라고 말한 파토스, 로고스, 에토스 따위는 몰랐지만, 경험을 통해 몸에 익히게 된 셈이다.

  우선 고객의 모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줘야 한다. 이때 적절한 맞장구는 필수이다. 그의 감정에 동해서 “나라도 기분이 나쁘겠다, 화가 날 만한 상황이다.” 등이 적절하다. 그렇게 당신의 심정을 내가 충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이 과정은 설득할 상대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파토스에 해당한다.

  그러고 나면 그 상황이 일어난 원인을 함께 고민해주고 해결책을 제시해줘야 하는데, 담당자로서 해줄 수 있는 부분과 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논리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이것이 로고스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대가 나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만으로 대부분의 민원은 해결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에, 도움을 못 주는 것이 나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점을 꼭 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제가 상담사다 보니 시스템을 바꿀만한 능력이 없어요. 이런 점은 바뀌는 게 맞다고 저도 생각해요. 꼭 상부에 건의해놓겠습니다.”라며 달래줘야 한다. 이것은 설득하는 화자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에토스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상담사가 자신을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면 대부분 마무리가 좋게 끝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이런 분들은 윗사람을 찾으니 차라리 더 낫다. 물론 민원을 받아주는 팀장이 있을 경우에 해당하는데 경험상 그런 팀장은 드물다.    

 

모래나 먼지만큼 많은 선물을 준다 해도 마음 아프게 하는 모욕의 대가를 다 치르기 전에는 아가멤논은 결코 내 마음을 설득하지 못할 것이오.
일리아스 제9권 385행     


  아가멤논은 전쟁 상황이 악화하자, 자신에게 화가 나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아킬레우스를 설득하려 한다. 그는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인정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선물 목록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직접 사과하러 가지는 않고 의사만 전달할 뿐이다. 그의 지시에 따라 오뒷세우스, 포이닉스, 아이아스가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한 명씩 연설하듯 아킬레우스를 설득하려 시도한다. 아킬레우스 부친의 충고나 동료들의 위험한 상황을 언급하고, 전투 참여로 얻게 될 명예와 선물 목록으로 환심을 사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하고 만다. 오히려 아킬레우스는 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더욱더 성을 낼 뿐이다.

  그들의 설득을 살펴보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들은 그의 분노에 공감이나 위로는 없고 외려 그의 불편한 마깨닫게 하고 잘못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나의 의견을 관철하고자 하면 상대의 마음 상태부터 파악해야 한다. 이것이 밑바탕이 되었을 때 설득이라는 문을 열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설득의 3요소 중 파토스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용돈을 조금 더 받기 위해 엄마가 가장 기분 좋을 때를 찾으려 눈치를 살핀 경험이 누구나 있지 않던가.


  문득 하루에 과연 몇 번이나 설득이라는 행위를 하고 사는지 궁금해졌다. 논리적으로 상대를 압박하며 하는 거창한 설득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소하게는 오늘 저녁 메뉴를 정할 때 내가 먹고 싶은 것으로 시키기 위해 그 음식을 오랫동안 못 먹었다고 가족들을 현혹한다. 그리고 작은아들에게 자신의 방을 청소하면서 다른 방도 함께 하는 것이 아주 효율적이라는 점을 들어 집 전체를 청소하게도 한다. 또한 수업을 상담하러 온 학부모에게 고전 읽기의 좋은 점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등록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을 설득하는 일은 매일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나를 설득하는 일은 하루에도 여러 번이다. 알람을 끄며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 떠올리고 아침 메뉴로 적절한 것을 재료를 살펴보며 결정하고 오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자신과 합의를 봐야 한다. 이렇듯 자신을 끊임없이 내가 정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자신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자주 실패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타인보다 설득하기가 더 어려운 대상이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설득할 때 필요한 것은 감정이나 인격,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사랑과 의무이고, 모임에서 오지랖을 떠는 일 성격이고, 어려움을 호소하면서도 철학 스터디를 탈퇴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지적 호기심이고, 밤을 새우며 드라마를 보도록 이끄는 것은 즐거움이다. 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상황마다 나를 설득시키니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자신이 되었든 타인이 되었든 설득한다는 것은 요령이 필요한 것만은 틀림없다. 거창한 이론을 이해하고 못하고 보다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지 아닌지가 중요할 것이다. 아가멤논의 사절단도 나처럼 경험이 많았다면 그런 식으로 설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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