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 우리가 이 싸움을 피함으로써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을 운명이라면, 나 자신도 선두 대열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또 남자의 영광을 높여주는 싸움터로 그대를 보내지도 않을 것이오. 하나 인간으로 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무수한 죽음의 운명이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우리가 적에게 명성을 주는 아니면 적이 우리에게 명성을 주든 자, 나갑시다!
일리아스 제12권 321행
사르페돈과 글라우코스는 트로이의 동맹군으로 뤼키아에서 온 장수들이다. 아카이오이족의 방벽을 앞에 두고 서로 전의를 다지고 있다. 높은 지위에 있는 만큼 남들과 다르게 권력과 부를 누렸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선두 대열에 서서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는 의지이다.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그 가치는 드높이고자 한다. 이러한 의지의 결과로 사르페돈은 방벽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적의 공격에 죽게 되고 아버지인 제우스가 안타까워하며 뤼키아로 시신을 보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한다. 신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전쟁 중에 그의 죽음만 특별 처리한 것을 보면 사르페돈이 윤리적 의무를 다 하려 한 태도에 박수를 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사전적으로 죽음은 아주 단순하게 ‘생명체의 생명이 없어지는 일’로 정의되어 있다. 의학적으로 사망은 더는 심장이 뛰지 않아 온몸에 혈액 공급이 되지 않고 폐로 숨 쉴 수 없으며 뇌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이다. 이 세 가지 심장, 폐, 뇌 중 일부라도 작동이 되거나 보조 장치의 도움으로 기능을 한다면 사망 선고를 하지 않는다. 흔히 알고 있는 뇌사가 이런 경우이다.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왔다. 그것이 의학을 발달시킨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세상과의 이별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 즉 영혼의 세계를 만들어 삶을 이어가려도 했다. 물론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 믿음은 많이 상실되었다. 이런 노력은 절대적인 운명을 벗어나려는 우리의 의지일까? 아니면 헛된 욕망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으로 현대의 죽음은 절대성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다.
‘100세 시대’라는 단어가 놀라움으로 다가왔으나 이제는 당연함으로 내 옆에 앉아있다. 우리 아이들은 ‘130세’까지 산다고 하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것은 축하할 일인가? 안타까워할 일인가? 노인 인구의 증가를 예상했지만, 그 속도는 우리의 예상보다 더 빠르다. 사회는 대응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 중이지만 여전히 부족한 면이 많다. 노령 연금을 지급하고 실버 층을 대상으로 한 기관이나 프로그램들을 양성하고 웰다잉에 대한 강연도 늘었다. 그럼에도 소외되고 방치되는 노인들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또한 노년을 맞이해서도 그의 부모를 모시게 되는 상황 즉, 노인이 노인을 모시는 시대마저 도래했다. 자신의 몸과 노후를 돌보지 못한 채 더 늙으신 부모를 봉양하느라 힘에 버거워한다. 그리고 거동이 불편해지면 마지못해 요양 병원에서 삶의 끝을 기다리는 분들도 많아지고 있다.
우린 흔히들 말한다. 병원에서 인생을 마무리하거나 홀로 고독사 하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이런 죽음은 쓸쓸해 보여서 싫기도 하지만, 삶의 의미가 전혀 없어 죽은 것과 별다르지 않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연명치료 거부나 심폐소생술 거부에 대한 의사 표시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 이를 입증하는 듯하다. 나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가족에서 이것을 모두 공표해놓았고 ‘연명치료 거부 사전의향서’를 작성했다. 내 삶을 마무리 지을 때 원치 않는 모습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나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죽음을 결코 맞이하고 싶지 않다.
2018년 5월 1일 경향신문에 ‘104세 호주 과학자 존엄하게 죽기 위해 스위스 여행 떠난다’라는 기사가 소개되었다. 호주의 최고령 과학자인 데이비드 구달(당시 104세)은 2016년까지 대학에서 교수로 재임했으나 건강이 악화한 뒤로 존엄사를 희망하게 되었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것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 아니고 삶의 질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죽는다는 게 특별히 슬픈 일은 아니다. 진짜 슬픈 것은 죽고 싶은데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접하면서 인간은 살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이제 죽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하는 시대를 맞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존에 급급한 시절은 끝이 났고 삶의 질을 따지는 시절인 만큼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이 하루하루를 살 게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가 바라던 그 하루를 그저 멍하게 텔레비전이나 보며 시간을 때우는 식으로 살아야 한다면 나의 인생을 존중하는 의미로서 생의 마감을 택할 것이다.
자연적인 죽음이 아닌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방법으로 안락사와 존엄사가 언급된다. 이 둘은 비슷하면서도 그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먼저 안락사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생명을 인위적으로 종결시키는 모든 행위로 의사가 주체가 된다.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소극적 안락사라 할 수 있고, 의사의 도움으로 약물을 통해 생을 마감하는 것은 적극적 안락사라 할 수 있다. 특히 적극적 안락사의 경우 기대 수명이 6개월 미만인 불치병 환자에 한해서만 시행되고 우리나라는 아직 불법이다.
이와 다르게 존엄사는 환자의 선택을 중요하게 여긴다. 좁게는 소극적 안락사와 통하지만 넓게는 의사의 조력 없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기사에 소개된 데이비드 구달의 말처럼 죽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슬프게 하는 시대이다. 그 방법으로 존엄사는 하나의 새로운 권리이자 인권 보호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존엄사는 자살과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자살도 스스로 생명을 단절시키는 행위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 삶의 고통과 문제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통상적이기에 내 삶을 존중하며 마무리 짓고 싶은 것과 엄연히 다르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존엄성을 그저 숨 쉬는 것 자체로 볼 것인지 의지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볼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선택이다.
나 또한 몇 살까지 어떤 모습으로 살 게 될지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소풍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모습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질병으로 고통이 떠나지 않거나 나의 의지로 나를 움직일 수 없거나 살아가는 이유를 잃었을 때 난 돌아가고자 한다. 그때가 되었을 때 방법은 물론 수면제 사용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현재는 존엄사가 인정되지 않으니 선택할 방법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또한 다른 안타까움은 나의 죽음을 당당하게 밝히고 갈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이다. 존엄사가 인정되지 않는 한 ‘자살’로 불릴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이 끝도 없이 늘고 있는 지금, 존엄사는 논의되어야 하고 하나의 권리로 인정해야 한다. 인권이 생명을 보호하듯이 죽음도 보호해주기를 바란다.
사르페돈은 죽으면서도 자신의 무구와 시신을 지켜달라고 동료에게 부탁한다. 적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의 죽음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