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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벤다허브 Jul 25. 2022

5. 부모도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일리아스를 읽으며 수다를 나누다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 집게로 고정하고 드라이할 준비를 마쳤다. 선명하게 반짝이는 흰 머리카락 하나. 올해 들어 부쩍 자주 만나게 되는 반갑지 않은 녀석이다. 흰머리가 보이면 길게 자라기도 전에 족집게로 뽑기 일쑤였다. 나이 듦에 딱히 싫은 감정도 없지만 흰머리는 미관상 좋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유독 많이 눈에 띈다. 아들 녀석 말로는 내 손이 닿지 않는 뒷부분은 제법 자라고 있다고 한다. ‘아! 이제 내가 어떻게 손쓸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는구나.’ 흰머리 뽑기 작전의 한계치에 온 것을 받아들이고 그만두기로 했다. 자주 만날 녀석을 그만 괴롭힐 때가 된 것이다.


 이렇게 내가 손 쓸 수 없는 또 하나의 영역이 최근에 늘어났다. 아들 녀석들의 교육비로 나의 한계점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부모로서 그것이 능력 밖의 일이 되는 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다. 특히 형편상 맘껏 공부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절대 내 자식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던 일이었기에 비참함은 배가 된다.      


헥토르야, 내 아들아! 제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너 혼자서 저 사내를 기다리지 마라. 펠레우스의 아들에게 쓰러져 곧 운명을 맞지 않으려거든, 그는 너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무정한 녀석! 이 가련한 아비를 불쌍히 여겨라! 늘그막에 온갖 불행을 눈으로 보며 비참한 운명 속에서 죽게 하시려는 이 불행한 아비를 말이다.
일리아스 제22권 38행      


  아킬레우스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성문 밖에서 적을 기다리는 헥토르를 바라보며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 왕비는 하소연한다. 문만 열고 들어오면 죽음을 피할 수 있음에도 버티고 있으니 얼마나 간절했겠는가. 헥토르 또한 두렵기는 했지만, 자신의 독단으로 악화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결국 부모의 설득은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부족하여 아들을 도울 수 없는 그 상황이 한없이 고통스러웠으리라. 죽음을 앞둔 자식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부모로서 한계가 드러남에 눈물짓는 중이다.


  뻔한 형편에 집에서 큰맘 먹고 보낸 인문계 고등학교는 생각지 못한 돈이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충 수업비며 문제집 비용이며 독서실 비용 따위가 그랬다. 학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공부를 좋아하는 딸이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가지길 바랐다고 한다. 어머니도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에 학업을 하실 수 없었던 그 열망이 나에게 투영된 것이다. 하지만 앞일은 의도와는 다르게 흐른다. 4년제 대학을 보낼만한 형편은 되지 않았고 전문대를 나와 빨리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 했다. 나 또한 너무도 당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수능 성적표를 받고는 자괴감에 빠졌다. 집안 형편에 맞춰 전문대를 가자니 없던 자존심이 정체를 드러냈다. 나보다 성적이 못한 친구들도 가는 4년제 대학이 절실해졌다. 오로지 학비가 저렴하다는 이유로 처음 들어보는 대학에 부모님을 설득해서 입학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용돈을 벌기 위해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보냈다. 배낭여행이며 어학연수가 유행처럼 번졌지만 남의 이야기였다. 아르바이트 비용으로 배우던 그래픽 디자인은 결국 돈의 한계에 부딪혀 접게 되었고 되는대로 취직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딱히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없다. 우리 집 형편은 나도 알고 있었고 부모님도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못한 것은 언제나 아쉬움이었고 나의 자식만큼은 같은 경험을 시키지 않으리라 다짐에 다짐을 했을 뿐이다. 물론 본인이 공부에 뜻이 있을 경우에 해당한다.


  큰아들이 고등학생이 되면서 한계를 만났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라 학원비에 대한 부담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학원에 간 녀석이 부쩍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둘째는 바로 학원에 보내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두 아들의 학원비로 부모의 능력 부족을 실감하는 중이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사교육비에 무서움이었다. 자식의 공부를 위해 부모가 희생해야 하는 단계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난 그다지 희생정신이 투철한 엄마가 아니라는 점이다. 가족을 위해 나를 포기하는 일 따위는 없다. 나는 내가 소중한 이기적인 엄마이고 부인이다. 나를 잊은 채 나름의 헌신을 하며 살아본 결과, 나나 가족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달았다. 강제적인 희생은 원망과 보상을 갈망한다. 그것이 오히려 가족의 관계를 해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고등학생이 생기는 순간 내가 꿈꾸는 공간을 가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감을 느끼고 한 달여 만에 학원을 열었다. 그것은 물론 코로나 19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를 괴롭혔다. 학원을 운영해도 외부 수업으로 충분히 충당할 수 있었기에 과감할 수 있었는데 모든 수업이 사라지고 백수가 되었다. 반면 아이들의 학원비는 수입에서 아주 큰 몫으로 자리 잡았다. 돈을 더 벌어야 할 시기에 심각한 적자를 떠안은 셈이다. 그간 알뜰히 모은 비자금이 뭉턱뭉턱 사라지는 마법을 체감해야 했다. 현재는 다행히 적자는 벗어났지만, 아이들 학원비의 절반도 보태지 못하는 형편이다.


  누군가는 아이들을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줘야 한다며 나를 무척이나 이기적인 사람 취급을 한다. 고등학생 입시 관련 수업을 하면 학원도 운영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며 적극 추천도 한다. 사업을 시작했으면 돈을 버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고민이다. 틀린 말은 아닌데 끌리는 말도 아니다. 이 공간을 입시를 위한 장소로 활용하고 싶지 않은 허황된 꿈도 있고 아이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나의 꿈을 접는 상황을 원치도 않는다. 그래서 고민 중이다.

  부모라면 응당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우리의 통념은 강요를 자행한다. 그렇지 않은 부모는 자격이 모자란 것으로 취급된다.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순간 아이에게 결과를 요구하고 집착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나의 희생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풀지 않을 자신이 없다. 내 것을 포기한 것에 대한 보상이나 원망을 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이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그래서 더욱 고민 중이다.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자식의 뒷바라지를 포기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없는 동생네에게 조카들에게 투자할 것을 넌지시 권하거나 할머니 찬스가 가능한지 농담으로 물어보거나 집을 파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남편에게 지나가는 말로 내뱉는다. 이렇게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다.


  우린 언제나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게 되고 그것을 극복하려 애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도록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희생이 필수가 아니고 이기적인 것이 당연하다는 것도 수용해야 한다. 내가 나를 아껴주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수는 있지만, 물질적인 것이 항상 답은 아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자식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을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 왕비는 평소에 통치자로서 국민을 아끼는 마음과 자세를 아들 헥토르에게 보여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죽을 것을 알지만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성문 앞에서 당당하게 아킬레우스를 기다리는 패기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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