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이 열어준 세계, 사랑이 만든 아비투스
엊그제 연차를 쓰고, 좋아하는 최재림 배우가 나오는 뮤지컬을 보고 왔다.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 중인 '시라노'.
19시 30분에 시작하는 밤 공연이었는데 공연장에 4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며 기다렸다. 어린왕자처의 여우처럼 기다림이 행복했다.
예술의 전당인만큼 연극, 클래식 음악 공연, 미술 전시회 등이 다른 강당에서 함께 열리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던 카페 옆에는 한국 오페라의 역사를 작게 전시해놓았는데, 글을 쓰다가 잠시 구경했다. 성악을 전공한 최재림 배우는 이런 것들을 학교에서 공부했겠지? 하는 마음으로.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그리고 옛날임에도 너무나 그 실력이 좋아 깜짝 놀라기도 했다. 처음엔 그냥 어떻게 생겼는지만 보려고만 했는데 어느새 복원된 클립들을 모두 다 끝까지 듣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최재림 덕분에 이런 것도 알게 되었네.' 생각하며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얼음만 남은 바닐라 라떼를 바라보며, 문득 내가 그를 좋아하고 나서 생긴 변화들을 떠올려봤다. 그가 부른 노래들, 그의 인터뷰들, 그가 요즘 읽고 있다고 한 책들을 따라 읽으며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에 그 사람의 현재, 과거, 미래가 함께 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세계는 그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 사람의 과거들을 데려옴으로 인해 나의 현재는 새로운 미래를 창조한다.
그를 좋아하기 전에는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만 보며 살았다. 익숙한 것들, 안전한 것들만 보고 즐겼다. 그런데 그가 부른 음악을 듣고 한 뮤지컬이 궁금해졌으며, 그 뮤지컬을 시작으로 라이브 공연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으며, 결국엔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매력에 푹 빠졌다.
뿐만 아니라 그가 우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한 인터뷰에서 읽고 나서는, 칼 세이건과 아인슈타인이 궁금해져 관련 책들을 찾아보았다. 그가 후배들에게 '똑똑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이를 나의 삶에도 적용해보고자 했다. 매사에 있어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제 나를 구성하는 것 중 뮤지컬을 빼놓을 수가 없다.
내 취향과 습관은 점점 그의 세계를 따라 움직였고, 어느 순간 완전히 나의 것으로 포섭되었다.
사랑이 만들어준 아비투스인 셈이다.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평생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내가 뮤지컬을 좋아하는 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날 오페라 전시에서 이런 재미를 느끼지 못했겠지.
나와 거리가 정말 멀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 세계를 열어주는 사람만 만난다면 놀라울만큼 익숙해진다.
이 날 본 뮤지컬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문무를 모두 갖춘 용맹한 남자 '시라노'의 이야기를 다루는 뮤지컬이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대의'가 아니라, 사랑하는 여인과 낭만적인 시다. 이를 자신의 달과 같다고 표현하는 시라노.
내게 '덕질'이 그렇다. 어두운 밤 속 달빛 같다. 내가 길을 잃을 때 빛을 밝혀주기도 하고,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을 드러내게 해주는 빛나는 존재.
내가 사랑하는 예술인들에게 꼭 말하고 싶다. 나의 세계를 넓혀줘서 진심으로 고맙다고.
* 뮤지컬 시라노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