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비우고 남기는 것
신아람의 '비움 프로젝트'는 피아니스트 신아람을 중심으로 색소포니스트 김기범, 드러머 김선빈으로 구성된 재즈 트리오다. 비움 프로젝트에 참여한 세 멤버 모두는 재즈피플 라이징 스타 출신으로, 피아니스트 신아람(2017), 색소포니스트 김기범(2020), 드러머 김선빈(2023)은 각자의 영역에서 실력을 인정받아온 아티스트들이다. 신아람은 2022년 발매된 그녀의 정규 3집에 처음으로 '비움 프로젝트'로 이름을 붙이며,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여겨온 것들을 비울 때 어떤 일이 발생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음악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그녀의 정규 음반으로는 4집이자, 비움 프로젝트의 두 번째 음반인 'After Bium'을 발매했다. 그저 무언가를 덜어내는 차원의 비움을 넘어, 무언가의 해상도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과정으로서의 비움을 음악적으로 그려냈다. 덜어낸 자리에서 오히려 또렷해지는 감각, 이러한 해상도를 따라, 청자는 여행하듯 앨범을 넘실넘실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콘서트는 세트리스트의 트랙마다 피아니스트 신아람의 해설이 먼저 이어지고, 곧바로 해당 곡의 연주가 시작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음악의 의미를 찾기 위해 헤맬 필요 없이 감상 포인트를 제공받을 수 있기에, 청자는 음악이 품고 있는 정서와 서사를 더 깊이 그리고 여유 있게 음미할 수 있다. 총 8곡이 연주되었고, 각 곡은 하나의 이야기처럼 편안하게 이어진다.
1. To My Youth: 어릴 적 기록들을 되짚으며 비움의 여정을 시작한다.
2. The Farewell: 비움의 첫 번째 과제는 ‘작별’이다. 사람, 시간, 기억과의 불가피한 작별 인사를 떠올려볼 수 있는 곡이다.
3. Hometown Reverie: 곡을 쓴 신아람 피아니스트가 나고 자란 동네의 재개발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 곡. 오래 알고 지냈던 동네에 대한 안정감과 그리움, 정체성이 담긴 곡.
4. 밤고양이: 늦은 밤 홀로 곡을 작업할 때 들려오던 고양이 울음소리에서 영감을 받은 곡으로, 고요하고도 치열한 응원의 메시지를 담았다.
5. 자유로운 보폭 (Free Strides): 비움을 통해 찾은 ‘나다움’. 세 명의 연주자의 솔로 구간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곡이기에 각 연주자의 개성과 스타일을 알 수 있다. 각 악기가 자유롭게 움직이다 하나로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조화도 들을 수 있다.
6. May All Be Peaceful: 비움으로 갖게 된 나의 평화처럼, 모두의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곡이라고 한다.
7. 엄마의 정원: 어머니의 따뜻한 말, “너는 내가 수십 년간 정성껏 가꿔온 나의 정원이야.”라는 말에서 시작된 곡.
8. Journey Unbound: 비움 이후 시작되는 또 다른 여정.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새로운 출발의 다짐이 느껴지는 곡이다.
이중 가장 깊은 울림을 준 곡은 '엄마의 정원'이었다. 처음 신아람 피아니스트가 곡과 얽힌 일화로, "너는 내가 정성껏 가꾼 정원이야"라는 말이 사실 아리송하게 느껴졌다. 이 말이 왜 감동적으로 느껴졌는지 잘 알 수 없었는데, 음악이 시작되자, 매일 아침 햇살 아래 텃밭을 가꾸었을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매일 물을 주고 자라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랑의 루틴'. 가꾸는 마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 그게 바로 사랑이었다. 공연 시작 전, 관객들에게 국화씨 하나가 나눠졌다. 이 곡을 소개하며 소중한 사람에게 국화씨를 선물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 씨앗을 엄마에게 드렸고, 내 안에는 엄마를 심었다.
지브리 음악이 생각나기도 했던 '엄마의 정원'은 내게 공연 중 가장 큰 카타르시스를 안겨준 곡이었다. '카타르시스'란 그리스어로 '깨끗하게 한다'는 뜻으로, 많은 의학 서적에서 '배설'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문학에서 카타르시스는 '비극 속의 연민과 공포를 통해 마음이 정화되고 쾌감을 느끼는 일'이며, 심리학에서는 '자기가 직면한 고뇌 따위를 밖으로 표출함으로써 강박 관념을 해소시키는 일'이다. 다시 말해 카타르시스란 억눌린 감정을 예술을 통해 해소하며 심리적 정화를 경험하는 것을 일컫는다. 눌러두었던 감정이 예술 앞에서 터져 나온다. 나의 경우, 글을 쓰며 다시 감정의 정체가 다시금 알 수 있게 정리된다. '비움 프로젝트'는 음악으로 다시 정리했던 셈이다.
예술을 감상하고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감정 대청소'다. 청소는 삶 속에 쌓인 먼지를 치워내는 불가피한 과정이지만 어쩐지 미루게 된다. 언젠가 쓸지도 몰라, 소중한 추억이야, 이건 아까워...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물건 그 자체보다 사실 물건 속 감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청소를 막막해한다. 그렇지만 공간은 유한하다. 가득 찬 방 안에서는 새로운 바람이 들어올 틈이 없고, 내게 진짜 소중한 물건들이 빛날 여백도 사라진다. 여행을 갈 때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짐을 줄이고, 정말 필요한 것만 넣는다. 그래야 몸도 마음도 가볍다. 진짜 나를 위한 삶도 마찬가지다. 정말 소중한 것만 남길 수 있어야 설렘도, 행복도 비로소 자리를 잡는다. 삶을 여행하듯 살겠다고 종종 스스로에게 말하는데, 정말 필요한 것만 지니고 가고 싶은 곳을 가겠다는 결심이다.
신아람의 ‘비움 프로젝트’ 역시 “버린다는 건 덜어내는 게 아니라, 나다움을 선명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철학을 음악 구조 속에 정교하게 담아냈다. 일반적인 피아노 재즈 트리오에서 중심이 되는 콘트라베이스를 과감히 비우고, 피아노–색소폰–드럼이라는 조합으로 청자가 비움을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했다. 빈자리는 허전함이 아니라 해방감이 된다. 이 해방감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비움을 상상하게 한다. 음악에서도 무엇을 비우느냐가 곧 무엇을 들리게 하느냐를 결정한다.
마지막 곡 'Journey Unbound'는 비움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고, 이제는 주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메시지로 끝맺는다. 함께 공연을 봤던 고모는 서재에 20년간 쌓아온 책들을 상자에 담아 중고 서점에 내놓았다. 나 역시 다이어리들을 정리했다. 청소와 정리를 평소에도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비움 프로젝트는 '격하게 공감이 가는' 프로젝트였다. 앞으로 신아람 피아니스트가 비울 것들이, 그리고 내가 비울 것들이 궁금해진다.
*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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