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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갖는 귀소본능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뮤지컬 초연

by 채수빈

나는 MBTI 검사를 할 때마다 어김없이 'J'가 나오는 인간이다. J는 Judging의 약자로, 목적과 방향을 따라 체계적으로 계획을 짜는 성향이다. 그런데, J 성향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더 잘 알 것이다. 인생은 계획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어떠한 이상을 꿈꾸며 나아간다 할지어다 인생에는 늘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난다. 그중에서도 인생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종류의 사고들이 있다. 기억상실증, 시한부 선고, 그리고 갑자기 생긴 첫사랑도.


01 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_반복된 날들_김인성.jpg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는 제목을 한 번에 제대로 말한 적이 드물었던 작품이다. 사고로 인해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작중 주인공 마오리처럼 매번 제목을 잊어버렸다. 제목의 어려움 때문일까, 어색한 기분으로 들어섰던 공연장이었지만 <오세이사>는 내게 '오늘'이 갖는 의미를 계속 떠올리게 만들었다.


03 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_공원 데이트 장면_이준, 장민제.jpg


작중 여자 주인공 '히노 마오리'의 기억상실증이 독특한 이유는 '오늘'만을 살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고로 인한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마치 하드디스크가 리셋돼버리는 컴퓨터처럼, 마오리가 갖고 있었던 어제의 기억은 모두 사라진다. 원치 않게 과거에 머무르는 마오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많은 기록을 남기며 내일 아침 그것을 열심히 읽어보는 것뿐이다. 남자 주인공 '가미야 도루'는 그런 마오리를 우연히 마주치고, 모종의 이유로 얼떨결에 사귀게 되지만 이내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도루는 매일 자신을 어색하게 기억하는 마오리에게 기억을 정리해 주고, 하루하루를 마음에 그림으로 새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06 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_소거_솔빈.jpg


이야기는 '사고'로 인한 전개가 주가 된다. 1막의 주된 설정이 마오리의 선행성 기억상실증이었다면, 2막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도루의 갑작스러운 시한부 선고다. 다소 급전개로 느껴질 수 있는 설정이지만, 어쩐지 <오세이사>는 워낙 극적인 설정으로 출발했기에 도루의 병이 크게 어색한 요소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오히려 인생에는 느닷없는 사고가,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소재로 적절하게 쓰인다. <오세이사>는 극적인 이야기와 청춘의 아름다움을 결합해, 어쩌면 인생은 그저 하나의 아름다운 '오늘'로만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09 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_너에게_ 솔빈, 나현영, 정지우, 김태한, 김강희.jpg


그리고 사이드 플롯이지만 오히려 내게 공감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켰던 요소는 도루의 가족 이야기다. 도루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작가를 꿈꿔왔으며 실제로 매일 집필을 하지만, 사실 투고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반면 도루의 누나는 집을 나가는 것까지 감수하며 자신의 꿈을 이룬다. 도루가 원망하는 것은 자신과 아버지를 두고 떠난 누나가 아니라, 한 번도 꿈을 향해 도전해 보지 않은 아버지였다. 도루의 아버지가 서랍에 숨겼던 원고들이 팔랑팔랑 땅으로 떨어질 때, 나 역시 삶에서 주저하다가 이내 미루었던 선택지들이 하나둘씩 스쳐지나갔다.


08 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_너에게_이준, 장민제, 오유민, 정지우, 임기홍, 김강희.jpg


도루는 '오늘'에 가치를 두는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오늘을 잊을 수밖에 없는 여자친구 마오리에게 어떻게든 최고의 오늘을 선사해 주려 노력한다. 그리고 '오늘'을 맞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원고들을 서랍장에서 꺼낸다. 한때 'You Only Live Once', 욜로가 비판받은 적도 있었다. 물론 이는 쾌락주의적으로 욜로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유효한 비판이다. 그러나 욜로의 본질적인 가치인 '삶은 한 번뿐이니 진심으로 살자'는 말은, 현재 이 순간 최선을 다하게 만든다.


04 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_내일의 네가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_김인성, 솔빈.jpg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바쁘게 살다 보면 하루의 특별함을 잊어버리기 쉽다. 오늘 아침에 뭘 먹었더라, 어제 무엇을 입고 나갔더라? 생각이 잘 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흐릿하게 반복되는 하루 속 갇혀 있는 느낌이 들 때, 그날을 스펙터클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다. 퇴근 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만날 때, 학교에 가서 짝사랑하는 친구의 옆모습을 용기 내 훔쳐볼 때, 최애가 출연하는 방송을 기다릴 때... <오세이사> 속 1막의 마지막 장면처럼, 마음속에서 불꽃놀이가 일어나는 것 같은 순간들 말이다. 그런 순간들은 아무리 붙잡으려 노력해도 결국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일 뿐이다. 기억하건, 기억하지 못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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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이사>의 연출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치 호그와트 계단이 움직이듯 무대장치가 앞뒤 그리고 좌우로 형태를 바꿔가며 움직인다는 점이다. 인생의 여정이 교차되는 지점들이 있지만, 각자의 시간의 속도는 결국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마법처럼 보여주는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영상을 활용한 씬이 많다는 점은 다소 호불호가 갈릴 지점이라고 생각했다. 원작 소설의 표지에도 등장하는 밤하늘, 불꽃놀이가 터지는 골목길의 경우 아름답게 쓰였다고 느꼈지만, 영상의 비중이 확실히 많은 편이었다. 공연예술의 가장 큰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현장성'이 방해받을 수 있는 요소라고도 느꼈다.


11 뮤지컬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_몸에 새기는 기억_이준, 장민제.jpg


공연을 보고 나온 후 우연히 들은 노래 두 곡, 엑소의 <피터팬> 그리고 육성재의 <그날의 바람>. 이 두 곡들이 어쩐지 <오세이사>의 분위기와 매우 닮아 있었다. 노래 영상 밑에 가득 찬, '내 학창 시절을 채워준 노래였다'라고 외치는 댓글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나이를 한참 먹어도 학생일 때 접했던 노래들은 우리를 청춘으로 아주 쉽게 소환한다. 마오리가 점점 기억을 찾아간 건 도루가 선물했을 영혼의 귀소본능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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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같은 청춘물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8월 24일까지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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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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