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숲재즈페스티벌에서 느낀 것들
솔플, 다시 말해 '혼자 놀기'에도 난이도가 있다. 혼밥, 혼영(혼자 영화 보기), 혼코노(혼자 코인노래방), 혼자 여행, 혼자 미술관까지는 꽤나 쉽다. 하지만 마니아층이 이미 뚜렷하게 있는 곳으로 향하는 건 다소 걱정이 앞선다. 처음 뮤지컬을 혼자 보러 갔을 때가 그랬다. ‘몇 분 전에 입장해야 하지?’, ‘혹시 내가 눈치 없는 행동을 해서 민폐를 끼치면 어쩌지?’,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하지?’ 어색함이 부른 초조한 상상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솔플보다도 백만 배 난이도가 높다고 느껴졌던 것이 바로 ‘페스티벌 솔플’이다. 올해 3월,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로 갔던 사운드베리는 나의 첫 뮤직 페스티벌이었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크게 걱정하고 있지 않았지만, 전날 밤 준비물을 챙기다가 우리 집에 돗자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긴장이 다시금 서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얼마나 이런 경험을 평소에 하지 않고 사는지도 실감했다.
결국 아침에 다이소에 들러 1인용 돗자리를 샀고, 간식으로 파이류 과자 두 개, 락앤락 용기, 쓰레기봉투용 비닐 두 개, 그리고 보틀에 커피와 차를 담아 출발했다.
가을이 막 시작된 어느 아침, 비가 지나간 뒤의 선선하고 맑은 공기를 느끼며 서울숲으로 향했다. ‘페스티벌’이라고 하면 보통 눈에 띄는 현수막, 북적이는 게이트, 굉음을 내는 사운드 체크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서울숲에 들어온 지 한참 되었는데도, 잠시 길을 헤맬 정도로 눈에 띄는 표식이 없었다. 계속 천천히 숲길을 걸어가자 멀리서 사람들 소리가 은근하게 들려왔다. ‘페스티벌 입장’이라기보다 산책하다가 우연히 음악을 만난 느낌이었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페스티벌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느꼈다.
서울숲재즈페스티벌의 가장 큰 매력은 '쉬움'이었다. 유료 관객뿐 아니라, 서울숲을 방문하는 누구나 재즈를 즐길 수 있도록 무료 스테이지, 초등학생 이하 어린이 무료입장, 반려동물과 함께 축제를 즐길 수 있는 펫존을 제공하고 있었다. 게이트를 나갔다가도 다시 자유롭게 돌아올 수 있고, 자리를 꼭 지키지 않아도 된다. 야외 페스티벌에 처음 와본 나로서는 엄격한 규칙이 없다는 것이 참 좋았다.
페스티벌의 오픈된 구조 덕분에 서울숲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대이자 공연장이 된다. 관객도 그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티켓을 미리 예매하고 본격적으로 공연을 즐기려 온 사람들, 산책하다가 우연히 무대를 발견한 사람들, 평소 루틴대로 러닝이나 강아지 산책을 하다 음악 소리에 이끌려 멈춘 성수동 주민들까지. ‘준비된 관객’과 ‘우연한 관객’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휘파람처럼 경쾌한 재즈 음악은 서울숲의 공기와 놀라울 정도로 잘 어울렸다. 라이브 공연과 숨 쉬는 자연이 서로를 돋보이게 하며 공명했다. 공연 중간엔 퍼레이드와 영화 <라이언킹>의 유명한 포즈를 따라하는 ‘심바 샷’ 타임이 있었다. 페스티벌의 본질은 무대가 아니라 ‘공유된 순간’에 있었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들뜬 에너지를 나누며,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리듬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음악은 사람들 사이의 공기를 매개로 계속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솔플의 특권은 '사람 구경'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본인이 이전에 즐겼으리라 추정되는) 다른 재즈 페스티벌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람, 다음 무대를 기다리는 사이 다른 페스티벌 일정들을 살펴보는 사람... 가장 눈에 띄었던 사람들은 이렇게 피크닉과 페스티벌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언제부터 공연을 익숙하게 즐기기 시작했을까?
속으로 궁금증을 품고 있는데, 문득 가족 단위 관객들이 눈에 띄었다. 1열에 앉은 아버지가 음악에 완전히 몰입해 온몸으로 리듬을 타고 있었고, 옆의 딸아이가 오히려 더 차분하게 음악을 감상 중이었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아이였는데, 음악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었다. 이를 보며 가족 단위의 문화 경험은 단순히 좋은 추억을 쌓는 정도가 아니라, 문화적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이런 현장 경험을 자연스럽게 겪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공연장이나 페스티벌에서 위축되기보다는 편안하게 몸을 두는 태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란, 한 개인이 속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몸에 밴 감각, 습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어떤 문화 공간에 들어왔을 때 무의식적으로 몸이 취하는 태도들은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축적되어온 경험의 총합이라는 뜻이다. 서울숲 재즈 페스티벌에서 본 사람들은 그날 형성되었던 문화 공간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향유하고 있었다.
아트인사이트 활동은 내게 이러한 아비투스를 만들어주는 중요한 계기다. 아트인사이트 덕분에 낯선 공간에 꾸준히 발을 들이면서, 문화가 일상이 되는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하다. 일에 치여 살다 보면 문화생활이 인생의 우선순위가 되기란 어렵다. 우리 가족이 돗자리 하나도 '굳이' 구비해놓지 않은 이유일 테다. 더구나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라이브 이벤트는 또 하나의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보고 싶은 것을 언제든지 스크린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굳이 기다리고, 찾아가는 행위는 참으로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주말에 서울숲으로 떠났던 음악 피크닉은 내가 효율성을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상기시켜주었다. 우리가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처음이 엄두가 안 날 뿐, 한 번 경험하면 계속 오고 싶을 거라는 것도. 공연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읽었던 책 <경험의 멸종>의 구절을 빌려, 이 비효율적인 문화생활이 지닌 소중함을 말해보고 싶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말했다. “관심은 가장 희귀하고 순수한 형태의 관대함이다.” 물리적으로 구현된 존재로서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즉 같은 공기를 마시고, 말로 하지 않은 서로의 감정을 느끼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몸짓에 공감하는 것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려면 그의 물리적 존재에 시간을 할애해야만 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이런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경험의 멸종, 87쪽)
몽테뉴는 수 세기 전에 이렇게 경고했다. “모든 사람이 다른 곳으로, 미래로 서둘러 움직인다. 아무도 자기 자신에게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면 시간, 인내, 지루함, 백일몽, 발견에 대한 기대가 필요하다.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경험의 멸종, 169쪽)
뜨거운 여름이 지나갔기에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시원한 날씨가 찾아왔다. 꼭 페스티벌이 아니더라도, 공원에 나가 사람들을 구경하며 재즈 선율을 들어보는 건 어떨까. 밤공기를 맞으며 나 자신의 존재도, 타인의 존재도 오롯이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위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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