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스라이팅
장녀라고 하면 흔히 챙겨야 하는 것들이 있다. 아들만 챙기느라 본인은 뒷전인 엄마도 챙겨야 하고
집안마다 다르겠지만 우리 집 같은 경우 정신없는 둘째 여동생도 챙겨야 한다. 마지막으로 떨어져 살지만 사고 치지 않는지 종종 남동생의 안부도 챙겨야 한다.
물론 잘살아서 본인만 신경 쓰면 된다면 모르겠지만, 나처럼 무심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다들 나보고 왜 그렇게 해?? 왜 네가 챙겨라고 말하지만, 난 그렇게 자랐다.
부모님은 자기들이 해야 할 양육을 나에게 떠넘겼다. 불합리함을 못 참는 나는 항상 따졌지만 그럴 때마다 "너를 힘들게 낳아줬는데, 부모의 은혜를 모른다며", 혼나곤 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 부모님의 양육방식은 가스라이팅이었다. 항상 본인들의 노고로 내가 세상에 나왔으며, 내가 곧 엄마이며, 동생들의 모든 것들을 책임져 줘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거절하면 그것 역시 나의 잘못이며, 나의 문제였다.
내 동생들은 집을 자주 나갔다. 집 나간 동생들을 찾는 건 나의 몫이었다. 전화나 문자도 두절이면 거실에서 누워 기다려야 했다. 내가 무엇을 하던 상관이 없었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던, 공부 중이던 뭐던. 동생이 나가면 나를 불렀다.
"너는 큰딸이 돼서, 언니가 돼서 뭐 한 거니?"
"네가 나가지 않게 봤어야지, 신경 써야지"
"엄마가 동생 때문에 힘드니, 네가 신경 써라"
항상 동생들의 잘못은 다 나의 잘못이었다. 그런 20년간의 삶은 내가 성인이 된 후 겪게 된 모든 일들을 다 나의 잘못으로 여기가 만들었다. 지금 서른이 넘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그렇게 잘못한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나쁜 사람도 아니며,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마음을 터놓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관계에서의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을 모두 다 나의 잘못으로 생각한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의 효과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힘이 없어진 부모에게 불만이나 잘못을 이야기하면, 결국 내가 상처를 준 것 같고 모두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있다. 왜 나는 항상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삶인지
KBS시사다큐에서 "장녀들"이라는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왜 이렇게 하나 같이 동생들은 많고 , 다들 힘들고 참는지. 도저히 시청 중에 마음이 아파 꺼버렸다. 다들 하나같이 생활력이 강했다. 우리 엄마도 사 남매의 장녀였다. 할아버지의 부재로 동생들의 학비를 벌어야 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삶을 나에게 물려주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피곤한 삶을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나는 포기를 못하고 자아를 찾고 싶은 사람이다. 책임감을 넘어, 가족에게 독립하고 싶은 사람이다. 혹시라도 나처럼 오랜 시간 동안 장녀 콤플렉스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