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지원 Oct 24. 2021

나는 왜 문학을 읽는가

문학 정신의 역사성과 총체성


사회학자 정수복을 칭하는 또 하나의 직함은 작가다. 사회학자이자 작가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표방한다고 본인이 밝히기도 했지만, 그의 출간 이력을 보면 작가다운 단행본들이 많다. 그가 어느 글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어느 날 소설을 쓴다면 이 책이 하나의 전범이 될 것이다.” 그가 푯대로 삼고자 하는 책은 스탕달의 『적과 흑』이다. 정수복 선생이 『적과 흑』을 읽고 쓴 글은 아주 흥미로웠다. 글의 서두를 옮겨 본다.      


“소설을 읽을 것인가, 사회학책을 읽을 것인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다. 왜? 재미있으니까! 소설과 사회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소설이 사람 사는 모습을 이야기로 만들어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면, 사회학은 사회적 삶의 모습을 분석하여 이론화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사회학자는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런데 19세기 말 사회학이라는 신흥학문이 등장하기 전에는 소설가들이 그런 질문에 답하면서 사회학자 노릇까지 했다. 1830년에 출간된 『적과 흑』은 소설책이면서 사회학책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1789년 혁명 이후 1805년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1815년 패전과 함께 몰락한 이후 다시 샤를르 10세가 다스리게 된 왕정복고 시기의 프랑스 사회를 한 청년의 삶과 죽음을 통해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적과 흑]을 재미있는 연애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다섯 가지 관점에서 사회학자의 눈으로 읽었다.”      


이 글은 사회학자의 다섯 가지 관점을 다루기 위함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정수복 스탕달’이라고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 글에서 다섯 가지 관점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이 어떻게 사회학책으로 읽힐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물음은 어려워 보이지만 답변은 간단하다. 작가의 눈이 포괄적이고 섬세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작가의 눈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작가들은 사회의 체계와 구조는 물론이고 세상사의 구석구석까지 조망한다. 인간관계의 심연과 행동의 복합적인 동기도 포착한다. 어느 한 시대를 공부한다면, 나는 역사서나 사회학책과 함께 그 시대를 담은 소설이 있는가를 살핀다. 걸출한 작가가 그 시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 있다면 그 책부터 읽을 것이다. 조정래 선생의 말로 이유를 대신한다.     

 

“어느 민족이나 어떤 나라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소설은 역사책보다 한결 더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역사책이란 대부분 정치사에 치중한 건조한 기록일 뿐이지만, 소설은 전통, 정서, 풍속, 습관 등이 다채롭게 펼쳐지면서 감동까지 주기 때문입니다. 감동은 예술 특유의 생명력인 동시에 마력적인 힘입니다. 그 힘은 우리 영혼에 오래오래 남아 삶을 의미 깊게 하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지엽적인 첨언이 필요하지만 큰 줄기에서는 지당한 말씀이다. 첨언하고 싶은 내용은 이렇다. 요즘의 역사는 건조한 정치사, 그 이상이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역사학계에서는 미시사와 거시사 분야가 개척되었고, 빅 히스토리라 불리는 학제 간 연구도 활발하다. 중세의 뒷골목에 대한 단행본이 출간되거나, 조선 시대 양반들의 일기나 땅 문서에 대한 연구결과 발표된다. 빅 히스토리 연구의 히트작으로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대표적이다.      


모든 소설이 역사성과 총체성을 품는 것은 아니다.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의식이 배제된 소설들도 많고 그것 역시 하나의 온전한 소설이다. 소설을 소설이게 하는 것은 원대한 주제의식이 아니라 서사와 묘사 그리고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예술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일부의 소설이 시대를 통찰하는 의식을 선사하는 것이지 모든 소설이 그래야 할 의무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고전에 오른 작품 중 상당수가 “그 민족과 그 땅의 삶을 총체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은 확실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설 독자에게 중요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총체성’은 작가에게는 하나의 경지이지만, 작품 이해나 읽는 재미에 보자면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다.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총체성을 그려낸 소설이 경이로운 작품으로 느껴질 것이고(인식의 즐거움을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렇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소설에서 자신의 관심 분야를 넘어서는 구절이 나올 때마다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 가령 소설의 총체성이란 읽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누군가에는 짜릿한 앎의 기쁨이지만 누군가에는 지루하고 의미 없는 상황이리라.      


“우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통해서 남북전쟁의 시대와 더불어 흑인 노예의 삶을 포괄하는 미국을 이해하게 됩니다. 『고요한 돈강』을 읽으면서는 오래된 역사가 무너지고 새 역사가 잉태되는 러시아의 격랑 시대와 함께 거대한 대륙에 뿌리내린 코사크 족의 삶에 동감하게 됩니다. 『레 미제라블』에 젖어 들면서는 예술의 나라 프랑스가 인간성 옹호를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가를 보게 되고, 프랑스의 예술은 정치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혁명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요컨대 소설 읽기는 복합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이야기가 안기는 감각적인 즐거움과 더불어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사회와 시대를 알아가는 인식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예리하고 포괄적인 시선을 가진 작가들의 소설을 읽는 이유는 그들이 그려낸 인생의 단면과 시대의 일면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배우는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소설이 선사하는 인식은 편협하지 않다. 작가라는 존재가 모순을 끌어안고 종합적으로 사유하기에 그렇다. 그네들의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도 주목해야 한다. 총체성을 위해서는 판단의 유보와 배제가 필연적이다. 판단해 버리고 나면 더 이상의 앎을 추구하기가 어려워지기에 그렇다.      


소설은 단편적인 사고에 저항하는 인문적이고 예술적인 방식이자, 성급히 판단하는 대신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노력이다. 총체성, 판단 유보, 예술적 방식, 정확한 인식, 이 모든 개념이 사랑스럽다. 이번 생을 살면서 훌륭한 소설을 손에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보다 즐거운 공부가 또 있을까. 앞으로도 기꺼이 훌륭한 소설에 시간을 주면서 살련다.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문학과 깊은 관계를 맺을 것이다. 어느 영문학 교수의 말처럼 “문학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절정에 다다른 인간의 정신”이다. 

작가의 이전글 문학은 어디에서 탄생하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