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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원 Oct 24. 2021

칠흑 같은 밤을 아시나요?

의식과 문화를 보여주는 거울


   

시골 마을의 밤하늘     


내가 사는 집은 양평의 작은 산에 면해 있다. 주소지로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양서면이지만, 편의점에 가려면 차를 타고 10분쯤 달려가야 하는 시골 마을이다. 겨울철이면 오후 여섯 시만 되어도 주변이 어두워진다. 도시에선 보기 힘든 어둠이다. 지인들이 놀러 오면 저녁 일곱 시가 서울의 새벽 두 시보다 깊은 밤처럼 느껴진다고들 말한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이다.      


‘칠흑’은 우리 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단어다. 칠흑은 옻칠처럼 검고 광택이 나는 빛깔을 뜻한다. 우리집 반려견의 빛깔이 칠흑이다. 칠흑이 어떤 색인지 이해하려면 옻칠을 알아두면 좋다. 옻칠은 우리말과 한자어가 합성된 단어다. 옻은 옻나무 줄기나 가지에서 뽑은 수액이나 독기를 뜻하는 순우리말이고 옻칠의 수액이나 옻나무 자체를 의미한다. 옻나무는 중국에서 도입하여 함경북도 일부 지방을 제외한 전국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수목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옻나무에서 수액을 채취하여 물건을 칠하는 도료로 사용해왔다. 최근에는 석유화학 도료에 밀려났다고는 하나 옻칠 도료는 어떤 조건에서도 방부가 잘되고 변색이 되지 않아 최고품으로 친다.      


나 역시 몇 해 전부터 옻칠한 수저를 사용해서 식사를 즐긴다. 색상과 입에 닿는 부드러운 느낌이 좋아 구입했지만 실상 옻칠은 뛰어난 도료다. 『전통 속에 살아 숨 쉬는 첨단 과학 이야기』(윤용현, 교학사)라는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옻칠은 안정된 특성을 가진 화합물로 존재할 뿐 아니라 외부 습기를 흡수하거나 방출하여 항상 일정한 수분을 머금어 유지한다. 그래서 나무로 만든 생활 용구나 금속기류 등에 옻칠을 하면 표면에 견고한 막을 형성할 뿐 아니라 광택이 나고 오랫동안 사용하여도 변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옻칠은 내구성이 뛰어난 천연 도료로 인정받게 되었다. 옻칠은 산과 알칼리에도 부식되지 않고 방수, 방충, 방부, 절연의 효과가 뛰어나 예로부터 가구, 칠기, 공예품 등에 널리 사용되었다. 도막의 우수성도 높아 앞으로 해저 케이블선, 선박, 비행기 등 산업용 도료로 이용 범위를 넓힐 수 있다. 연필꽂이, 필통, 명함 상자와 같은 사무용품에도 옻칠이 활용된다. 옻칠이라고 하면 막연히 가구나 그릇에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의 일상생활 어디에서나 옻칠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옻칠은 공해 물질을 만들지 않는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천연 도료, 옻칠! 칠흑은 이 옻칠에서 나는 검고 윤이 나는 빛깔이다. 이처럼 언어는 문화를 반영한다. 옻칠 문화가 없는 나라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표현을 쓸수가 없는 것이다. 문화는 하룻밤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언어가 문화만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의식은 나이가 든다고 절로 얻는 것도 아니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식을 타고나는 사람도 없다. 교육과 환경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살면서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 의식이다. 의식이나 문화는 배우고 익혀야 한다. 수고로운 일이지만 노력할 가치는 충분하다. 의식이나 문화가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마음속 생각이 행동을 창조하게 그렇다.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깨어있는 의식과 문화를 강조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탁     


참여정부 때 홍보기획비서관으로 노 대통령을 보좌했던 양정철이 전한 일화는 의식과 문화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양정철은 퇴임 후 봉하에 계신 노 대통령을 찾아가 정치에 나서고 싶다는 마음을 비쳤다.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노 전 대통령은) 출마를 말리셨다. 정치하지 말라고 하셨다. 정치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민주주의적 진보를 이루려면 국민들 생각과 의식을 바꾸고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중략) 그러니 정치하지 말고, 봉하마을로 내려와 같이 좋은 책을 내자고 하셨다.” 양정철은 두말없이 짐 싸서 봉하로 갔다. 의식과 문화의 진보야말로 중요하다는 노 전 대통령의 생각에 동의한 것이리라. 노 대통령을 떠났고 양정철은 홀로 책을 썼다.      


민주주의 틀과 구조는 정치와 행정을 통해 바꿔가야 하고, 시스템을 제대로 굴리려면 그에 걸맞은 의식과 문화가 갖춰져야 한다. 민주주의적인 의식과 문화는 일상생활 속에서 싹트고 꽃핀다. 그는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의식을 가꾸어가는 수단으로써의 ‘언어(말과 글)’에 집중했다. 언어생활에 주의를 기울임으로, 다시 말해 언어 민주화를 위해 노력함으로 민주주의적인 의식을 키울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평등, 배려, 존중과 같은 민주주의 가치들이 평등의 언어, 공존의 언어, 존중의 언어로 널리 사용될 때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식이 어떠한 수준인지 진단하는 방법 하나는 자신의 언어생활을 돌아보는 일이다.      


인문 소양의 기초     


언어가 민주주의 의식만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 공부도 언어로 시작되고 언어로 깊어진다. 요컨대 인문 소양은 언어로 드러난다. 점잖은 말투를 취하자는 뜻이 아니다. 인문학을 공부할수록 자신의 의도를 잘 포착하는 적확한 언어를 사용하고, 기만과 허영에 굴복하지 않는 진실의 언어를 쓰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한두 달의 인문학 공부로는 언어가 바뀌지 않는다.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이 깃든 언어 또는 사려 깊은 언어는 인문학 공부를 지속하면서 실제로 의식과 사유가 깊어져야 나온다.      


의식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싶다면 의식을 깨우고 고양시켜야 한다. 그 길뿐이다. 우회로는 없다. 평등 의식이 없다면 자기도 모르게 차별의 언어를 쓰게 된다. 우리나라는 국적이나 인종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축에 속하는 나라다. 2007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대한민국 국가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우리의 민족우월사상을 우려했다고 한다. 우리가 동남아 출신 외국인들을 열등하게 보는 경향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문제는 서양 사람들에겐 호감을 갖는 이중잣대다. 같은 흑인도 아프리카 출신과 미국 출신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해외에 살다가 돌아온 동포를 바라보는 시선도 차별적이다. 언어 민주화를 꿈꾸는 양정철이 조선족이라는 어휘에 칼을 뽑았다. “잘 사는 나라에서 온 동포는 ‘재미교포’지만 중국에서 온 동포는 흔히 ‘조선족’이라 부른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쓸 말이지 한국에서 쓸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조선족은 그들이 중국 사회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민족적 자존감을 지킬 때 중국 한족과 구분해서 쓰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우리 모두가 조선족이지 한족이나 아리안족이겠는가 하고 묻는 그가 옳다.      


특정 단어를 사용하느냐 아니냐는 단지 어휘력의 문제가 아니다. 한 개인의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이 드러나는 일이다. 굳이 역사의식까지 들먹일 필요가 있냐고? 그렇다. 조선족은 100년 동안 낯선 땅에서 한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왔다. 고향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나라가 제공했지 해외여행을 떠나듯이 자발적으로 이국 땅을 향했던 이는 드물다. 양정철은 이렇게 맺었다. 조선족은 “힘없던 우리 역사의 아픈 편린이다. 부러 따뜻이 대하지는 못할망정 얕보거나 무시하는 일은 몰역사적이다.” 그의 또 다른 문제 제기도 가슴을 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수 년 전 시골에서 심심찮게 눈에 띄던 현수막이 있었다. <동남아 숫처녀와 결혼하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동남아 여성과의 결혼을 홍보하는 “이런 문구가 현수막으로 버젓이 걸릴 수 있다는 건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야만성을 표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고것 참 쌤통이네!     


언어는 개인이나 사회의 문화를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했지만, 특정 단어를 성급하게 고유한 문화로 연결지을 순 없다. 단어에 관한 책을 읽다가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단어로 ‘잘코사니’를 꼽은 글을 보았다. ‘고소하게 여겨지는 일’을 뜻하는 잘코사니는 ‘주로 미운 사람이 불행을 당했을 때 하는 말’이다. 쌤통과 유의어다. 영어와 일본에서는 잘코사니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다고 한다. 독일에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가 있다는데, 독일은 합성어를 잘 만들어내는 나라임을 새삼 느꼈다. 잘코사니를 뜻하는 ‘한 단어’가 없는 나라들이 많다고 해서 쌤통이 우리 문화를 보여주는 단어는 아닌 것이다. 친구가 실패하면 눈물을 흘리지만, 친구가 성공하면 피눈물을 흘린다는 얘기를 듣고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쌤통을 다룬 연구서도 있다.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감정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에 대한 실험을 고안한 저자가 쓴 책인데, 우리말 제목이 『쌤통의 심리학』이다. 질투심과 수치심 등을 연구해 온 저자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쌤통 심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우리의 경험에 널리 스며들어 있다.” 쌤통이나 잘코사니는 우리 문화를 보여주는 단어가 아니라 인간의 흥미로운 본성을 보여주는 단어다. 언어는 의식과 문화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질적 특성을 포착한 잘코사니와 같은 단어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도록 돕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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