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머문 그리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꼭 일 년이 되었다.
새벽 3시 16분, 그 시간은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병실의 불빛은 희미했고, 기계의 전자음조차 조심스럽게 숨죽이던 새벽이었다. 창밖에는 겨울의 찬 기운이 스며들었고, 그 냉기가 이불 끝을 타고 방 안 가득 번져나갔다. 숨소리 하나조차 쉽게 낼 수 없던 그 순간,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식어가던 그 미세한 온도와 공기의 떨림이 아직도 손바닥 안에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스쳐간 미소는 너무도 조용했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가슴을 찢는 듯했다. 죽음이라는 말이 이렇게 잔인하게도 부드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시간은 흘렀다. 계절은 몇 번이나 바뀌었고, 세상은 어김없이 제 갈 길을 갔다. 사람들은 웃고, 거리는 변했고, 내일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내 안의 시간은 그 새벽에 멈춰 있었다. 달력의 숫자는 바뀌어도 내 마음의 시계는 여전히 2024년 11월 14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 이후의 아침들은 모두 같은 색이었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고, 잠에서 깨어나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 목소리는 어제의 말처럼 선명했고, 그 웃음은 여전히 따뜻했다.
세월은 나를 앞으로 데려가지만, 마음은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말하지만, 사랑의 기억은 결코 흐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색이 바래지 않는 사진처럼, 내 안에서 언제나 가장 선명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져도, 그 새벽의 빛만큼은 내 안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하루하루를 견디듯 살아왔다. 처음의 그리움은 눈물로 찾아왔지만, 시간이 지나자 눈물은 삶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슬픔은 더 이상 낯선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에 머무는 익숙한 온도가 되어, 매일의 호흡처럼 나와 함께 있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완전히 잃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한 시간 속에 자신을 묻어두는 일임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 새벽을 살고 있다. 살아 있는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른 새벽,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시각이었다. 시계를 보니 다섯 시 반, 세상은 고요했고 집 안은 숨을 죽인 듯 잠들어 있었다. 딸이 출근을 서두르며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서둘러 아침을 챙기고 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나는 차의 시동을 걸었고, 딸은 조용히 옆자리에 올랐다. 도로 위는 아직 한산했고,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차창을 비추었다. 신호등이 바뀔 때마다 붉은빛과 푸른빛이 번갈아 차 안을 물들였고, 그 빛 속에서 우리는 말없이 하루의 시작을 맞이했다.
의정부역 앞, 회사 셔틀버스가 서 있는 곳에 도착하자 딸은 짧게 "다녀올게요."라고 말하고 차문을 열었다. 그녀의 뒷모습이 버스 쪽으로 멀어져 가는 동안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버스가 떠나고 난 뒤에도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손끝에 남아 있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하늘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도로 옆 가로수 사이로 여명이 번지고, 엷은 햇살이 차창을 타고 스며들었다. 구름은 천천히 흘렀고, 그 사이로 비치는 빛의 결이 묘하게 아내의 미소를 닮아 있었다. 그 따스한 빛이 마음을 어루만지듯 스며들었지만, 동시에 서늘한 그리움이 가슴 깊숙이 내려앉았다. 그리움이란 것은 바람처럼, 스스로 찾아드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문득 마음 한편에서 '경복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오래전 어느 봄날, 휠체어에 앉은 아내와 함께 그곳을 걸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경회루의 잔잔한 수면 위로 흩날리던 꽃잎, 그 옆 카페에서 함께 마셨던 커피 한 잔의 온기, 그날의 바람과 향기, 그녀의 웃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장면을 떠올리자 발길은 저절로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그곳에서 다시 한번 그녀를 만나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덕계역에서 전철을 타고 종로 3가에서 3호선으로 갈아탔다. 이른 아침의 지하철은 아직 한산했고, 차창 밖으로 스치는 터널의 불빛이 일정한 리듬을 이루며 흘러갔다. 사람들의 낮은 숨소리와 안내 방송이 교차하는 고요한 공간 속에서, 나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을 품고 있었다. 경복궁역에 도착하자 5번 출구로 이어진 긴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길을 걸을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오래전 휠체어가 덜컹거리며 지나가던 소리, 그 진동이 다시 마음속 어딘가에서 되살아났다.
그날 우리는 차를 타고 갔었다. 동쪽 주차장에서 휠체어를 밀며 걷던 길 위에서 아내는 "이 길이 참 길어요. 그래도 좋네요." 하고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었다. 그 미소가 하도 따뜻해서, 그 순간이 오래 머물러 주길 바랐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길을 나 혼자 걸었다. 복도를 빠져나와 광화문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셔터 소리, 웃음소리가 한데 섞여 활기로 가득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줄을 지어 걸었고, 가족 단위의 관람객과 연인들은 저마다의 웃음으로 아침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활기 속에서도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세상은 다채로운 빛과 소리로 가득했지만, 내 안의 세상은 오직 한 사람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입장권을 받아 흥례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문을 바라보았다. QR코드를 찍고 문턱을 넘는 순간, 오래전 휠체어의 바퀴가 돌 위를 덜컹거리며 지나가던 소리가 다시 귓가에 들려왔다. 그때의 떨림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고, 시간은 단숨에 과거로 미끄러졌다. 넓게 펼쳐진 마당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북이 서 있었고, 오후 두 시에 행사가 열린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 행사의 북소리보다 내 안의 기억이 더 크게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동쪽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뜰에서는 수문장들의 훈련이 한창이었다. 긴 창끝이 공기를 가르고, 붉고 푸른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구령이 울릴 때마다 묵직한 울림이 마당을 채웠고, 사람들은 그 광경을 둘러싸고 셔터를 연신 눌렀다.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퍼지고, 외국인들의 환호가 겹쳐지며 공간이 살아 움직였다. 그 활기찬 풍경은 생기와 빛으로 가득했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 한가운데에는 고요가 내려앉았다. 나는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내 마음의 중심은 여전히 단 한 사람에게 닿아 있음을. 사람들의 웃음이 멀어지고, 깃발이 휘날리는 바람 속에서 나는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을 들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하며 웃던 그 얼굴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근정전으로 향하는 돌길은 여전히 거칠었다. 오랜 세월의 발자국이 새겨진 듯한 돌바닥은 고르지 않았고, 그 위를 걷는 발끝마다 작은 울림이 전해졌다. 근정전 앞마당 중앙에는 정1품에서 정 9품까지의 품계를 새긴 비석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그 돌들이 만들어내는 질서는 마치 시간의 흔적처럼 길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돌 위를 걷는 동안, 내 마음속에서도 오래된 기억들이 조용히 일어났다.
그날 나는 휠체어를 밀며 천천히 그 길을 올랐다. 바퀴가 돌 틈마다 덜컹거릴 때마다, 혹시 그 진동이 아내에게 전해질까 봐 손잡이를 더 꽉 잡았다. "천천히 갈게요." 그때의 말이 바람결처럼 귓가에 스쳤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미소가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셨다. 그날의 작은 떨림이 오늘도 내 손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돌길 옆에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눈에 띄게 부드러워진 길을 바라보며 마음 한편이 놓이는 동시에 묘한 씁쓸함이 밀려왔다. 이제는 이렇게 편히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건만, 정작 그가 이 길을 다시 걸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근정전 서편을 돌아 천천히 경회루 쪽으로 향했다. 햇살은 수면 위를 감싸며 잔잔한 물결마다 금빛으로 부서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단풍잎이 천천히 흩날렸고, 그 낙엽들은 고요히 물 위에 내려앉아 가만히 흔들렸다. 수정전 앞 '사랑카페' 야외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며 사람들의 발걸음을 바라보았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위를 한복을 입은 연인들이 걸으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 사이로 옛 기억이 스며들었다. "여보, 오늘 참 좋네요." 하던 그 목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다시 들려왔다.
경회루 앞 호수에서는 단풍잎이 물결 위에서 반짝였다. 잔잔한 수면 아래로는 푸른 하늘이 비치고, 그 위로 붉고 노란 단풍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멀리 북악산의 능선이 푸른 선을 그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경복궁 담장 아래 감나무 한 그루가 주황빛 감을 주렁주렁 매단 채 서 있었다. 햇살이 그 열매에 닿을 때마다 빛이 반사되어 그녀의 미소처럼 따뜻하게 빛났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나무 앞에 서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풍경 안 어딘가에, 여전히 그녀가 숨어 있는 듯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평온이 가슴속을 스쳤다.
근정전 뒤편의 강녕전과 교태전, 계조당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오래된 목재의 결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햇살, 은근히 풍기는 나무 냄새, 그리고 정제된 고요. 그 모든 것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 고요한 공간 속에서 나는 문득 그녀의 투병 시절을 떠올렸다. 아프다는 말을 삼키며 묵묵히 하루를 견디던 시간들, 약한 미소로 고통을 감추던 모습이 목재의 질감처럼 떠올랐다. 버텨야만 했던 날들의 무게가 이 오래된 궁궐의 숨결 속에 스며 있는 듯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로 기울고 있었다. 햇살은 담장에 길게 드리워지고, 궁궐의 마당은 서서히 하루의 끝으로 녹아들었다. 마음속에서도 해가 서서히 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쓸쓸함이 아니라, 오래 버텨낸 존재들이 지닌 깊은 평화로움에 가까웠다. 해가 기울 무렵 나는 동쪽문 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주차했던 자리였다. 경사로의 각도와 바닥의 질감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햇살은 낮게 비스듬히 그 위를 덮고 있었다. 그 빛은 오래된 기억처럼 부드럽게 번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마치 시간의 문턱 앞에 다시 선 듯, 그날의 장면이 눈앞에 되살아났다. 휠체어의 바퀴가 덜컹이며 지나가던 소리, "괜찮아요." 하며 웃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바람결에 얹혀 내 곁을 스쳐갔다.
나는 천천히 카메라를 꺼내 그 길을 한 장 찍었다. 화면 속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분명 그녀가 함께 있었다.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그 길 위에는 바람과 빛, 그리고 그리움이 살아 있었다.
돌아오는 길, 공예박물관 앞을 지날 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눈길을 끌었다. 늦가을의 빛을 머금은 잎들이 은은히 흔들렸고, 잔디에 닿을 때마다 빛이 반사되어 퍼졌다. 그 빛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기억의 온기처럼 부드럽게 마음을 감쌌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공원의 공예작품을 감상했다. 바람이 다시 불어오자 잎들이 부딪히며 작은 속삭임 같은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마치 그녀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인사동 거리로 이어졌다. 예전의 소박한 찻집들은 거의 사라지고, 그 자리를 세련된 간판과 커피 향이 대신 채우고 있었다. 낯설 만큼 밝고 현대적인 풍경이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오래된 다방의 의자에 머물러 있었다. 나무 의자의 질감, 탁자 위로 피어오르던 쌍화차의 진한 향기, 서로를 바라보며 나누던 짧은 웃음과 따뜻한 대화, 창가로 스며들던 오후의 햇살까지도 모두 그대로 되살아났다. 세상은 변했지만, 마음속의 그 풍경만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오후 여섯 시가 조금 넘었다. 문을 여는 순간 반려견이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하루 종일 비워 두었던 집의 공기가 금세 따뜻해졌다. 나는 녀석을 안으며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쪽 하늘은 해를 삼킨 뒤 잔잔한 푸른빛을 남기고 있었고, 공기에는 하루가 식어가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하늘빛 속에서 묘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여전히 내 곁에 머물러 있는 듯한 착각이었지만, 그 위로가 너무도 부드러워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창가 너머로 저녁의 빛이 천천히 스며들고, 하루의 끝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오늘 하루, 나는 그렇게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경복궁의 단풍 사이에서도, 돌아오는 길의 바람 속에서도 그녀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는 멀어져 갔지만, 내 마음속의 시간만은 여전히 그녀를 품은 채 그날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이별은 끝이 아니라, 사랑이 머무는 또 다른 형태의 시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밤이 깊어갈수록 집 안의 불빛은 하나둘 꺼져갔고, 창가에 남은 마지막 불빛이 벽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나는 그 빛을 따라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아직도 그녀의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은 바람처럼, 별빛처럼, 조용히 내 마음속을 스쳐갔다. 그리움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아주 잔잔한 숨결로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 숨결은 마치 늦가을 저녁의 바람처럼 따뜻하고도 서늘했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한없이 희미해지는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녀는 떠난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또 다른 생으로 머물러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살아간다. 눈부신 햇살 아래서도, 바람이 스치는 오후의 길목에서도, 그리고 불빛이 사라진 고요한 밤에도 그녀의 이름을 품고 살아간다. 그리움이 내 삶의 또 다른 맥박이 되어,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잊히지 않을 사랑의 시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나는 이렇게 하루를 살아낸다. 그리고 오늘처럼, 또다시 그녀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