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댁이 있는 부암동으로 올라가는 7022 버스는 늘 뒤로 기운다.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바뀌는 종로 풍경이 아름답다. 왼편엔 작은 빌라들이 줄줄이 서있고, 그 너머엔 남산타워가 보인다. 버스 맨 앞자리에서는 도봉산을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다. 올라가는 길 대부분은 맑은 날씨에, 아주 가끔 비나 눈이 내린다. 비를 싫어하는 나 조차도 이 동네만 올라가면 왠지 상콤한 기분이 든다.
‘서윤댁’은 내가 제일 아끼는 동생의 집을 부르는 이름이다. 한 번 그 집에 발을 들여놓고서부턴 도무지 가지 않을 궁리를 찾을 수가 없게 됐다. 일단 부드러운 금발머리의 남자가 있다. 금발머리 이미지와는 다르게 시골에서 왔다고 했다. 서윤댁에서 눈을 뜨면 늘 그 남자가 옆에서 자고 있다. 은근히 중독적인 꼬순내를 폴폴 풍기면서. 처음엔 지 꼴에 차도남이라고 손을 물었다가 혼이 났는데, 지금은 아주 요염한 자세로 내 다리에 자기 엉덩이를 들이민다. 매혹적인 자식···. 그 따뜻한 엉덩이를 잊지 못해서 가끔 서윤에게 카톡을 한다.
- 럭키랑 자고 싶어.
또 하나는 서윤댁만이 소유하고 있는 이상한 침대. 그 침대는 세검정로가 한눈에 보이는 안방 끝머리에 있는데, 이상하게 거기에 누웠다 하면 잠이 온다. 매일밤이 잠과의 사투인 나에게 5분 컷 숙면모드를 선사하는 그것엔 분명 어떤 영험한 기운이 있다. 거기에서 럭키랑 자다 일어나 서윤의 시그니처 메뉴인 참치김치볶음밥을 먹고 나면, 지금 당장 나보다 행복한 인간은 없을 거라는 UFC 챔피언 같은 자신감이 솟구친다.
그래도 서윤댁을 찾는 가장 큰 이유를 찾으라면 역시 집 그 자체다. 앞으로는 부암동이, 뒤로는 세검정 초등학교와 도봉산이 나란히 열을 맞추고 있는 곳. 아침에는 햇살이 내리쬐고 저녁엔 저무는 하늘을 가로 16:9 비율로 만날 수 있다. 옥상으로 한 층 더 올라가면 부암동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노을 지는 오후 즈음에 캠핑의자와 냉동실에 잠깐 넣어둔 맥주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 서윤과 맥주캔을 부딪치면, 이보다 더 시원한 행복이 없다. 야경은 또 어찌나 장관인지 모른다. 내 방도 내로라하는 뷰 맛집이지만, 시티뷰보다 멋진 건 자연환경과 낮은 건물이 조화롭게 섞인 풍경이다. 서윤댁엔 그런 지리적 축복이 있다.
한 번은 우연찮게 서윤댁에서 폭설 내린 아침을 맞았는데, 순간 평창 유스호스텔에 온 줄 알았다. 아침부터 뽈뽈뽈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노랑털 남자 옆에서 딸기를 먹으며 펑펑 내리는 눈을 봤다. 누구도 떠먹여 준 적 없는데, 정말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내 방도 분명 비싼 가구와 소품들로 예쁘게 꾸며놨는데. 꾸밈비용으로 따지면 내 방이 훨씬 더 행복해야 하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서윤댁에서 가장 큰 안식을 느꼈다.
영화 <소공녀>의 미소처럼, 요즘엔 집을 계속 찾아다니고 있다. 영혼이 평화롭게 즐기다 갈 수 있는 곳, 화려함이나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으나 그 어디보다 아름다운 곳을. 언젠가 완벽에 가까운 집을 발견하게 되면 모아둔 돈을 거기에 모두 쏟아부을 요량으로, 네이버 길 찾기에 '집'카테고리를 추가해 하나 둘 집을 모으고 있다.
그런데 난관에 부딪쳤다. 서윤댁이 그런 집과 80% 이상 부합하고 있어서. 그래서 일단은 그 이상적인 집에 자주 거처하고 있다. 그렇게 감각으로 몸소 배우다 보면 분명 나에게도 좋은 집이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