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작부터 한 노부인이 흔들의자에 앉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옷감들을 한 땀 한 땀 조각보를깃고 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에도 정교하게 수놓아지는 누군가의 운명처럼.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사람은 문득 운명에 대해 생각해 보기 마련이다. 이 푸른 눈의 고운 얼굴을 가진 할머니도 곧 잠에 빠져들듯 자신의 이야기에 스르르 빠져, 자긴의 운명을 헤아려본다.
어쩌면,기억 상실은
사실상 거꾸로 감긴 꿈일지도 모른다.
아마, 다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도, 무슨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지. 사실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럼, 어디서부터 말할까? 자기 주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된 때부터? 아니면 매일 밤 아버지의 추한 손버릇에 시달려집에서 도망 나온때부터?
아니면 메리.
항상 남자들의 말은 믿지 말라고 당부하던 그 애.
-그레이스, 너는 너무 순진해서 걱정이야. 여기서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돼.
남의 집 살이를 하면서 유일한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이상해 보이던 때부터? 그것도 아니면, 그전에 사과 껍질을 등 뒤로 던져 미래의 남편감을 알 수 있다고 그 애가 알려주던 때부터?
과연 누가 알까, 이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어떤 작은 징조라도.
빅토리아 시대 여자 무기수의 실화.
넷플릭스 오리지널'그레이스'는 마거렛 애트우드의 소설' 알리아스 그레이스'를 원작으로 한 6부작 드라마다. 원작의 내용과 진행 흐림이 유사하게 진행돼서, 완결까지 보고 나면 흡사 책을 완독 한 느낌이 드는독특한 작품.
당대 신문 기사 속 '그레이스'의 초상. - 믿음사에서 나온 번역서'그레이스' 본문 중에서.
1800년대 빅토리아 시대, 아직은 아이에 가까운 가정부가 자기 주인을 살해혐의로 기소된 실화로 시작한다. 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이 소녀의 증언이 밀도감 있게 펼쳐지면서,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그녀는 범인이었을까 되묻게 하는 심리 스릴러다. 실제, 그레이스와 함께 살해를 모의했던 혐의로 기소된 다른 남자 하인은 교수형에 처했지만 그녀는 살아남는다. 결국은 그녀가 정말 유죄이지 무죄인지 알쏭달쏭한 채로. 사건의 진짜 전말은 서로 다른 증언들에 묻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악마인지 천사인지 헷갈리는 그레이스를 연 구하기 위해 미국에서 찾아온 조던 박사와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그녀는 언제나차분히 자기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시의 중요 지점을끊어가며 이야기한다. 그리고그때마다 그 손에서 알 수 없는 이 이야기의 전말 같은 보자기가 들려있다.
박사와인터뷰하는내내, 그녀는차분히 바느질을 하면서 언제나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듣는 이로 하여금 그녀를 가련하게 생각하게 하고,하녀이면서도 지적인 자신만의 표현을 구사하는 이 특이한 이에게 빠져드는 신기한 화법으로. 그렇게 그녀 스스로의 이야기꾼이 되어 자신의 초기 삶을 증언한다.
그리고 모든 시간이 흐른 뒤에, 결국 자신만의 무용담인지 비밀인지를 지닌 채로 자신의 집에서 한가하게 바느질할 수 있는 노부인이 된 채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6부작 '그레이스'
총 6부작으로 미니 시리즈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깊이만큼은 대하소설 못지않은 이야기. 다 보고 나면 원작도 찾아보고 싶은 마력을 지녔다.
무엇보다 시종일관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없는 표정으로 보는 이를 들었다 놨다 하는 주연 배우의 호연이 반짝반짝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