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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제나 Dec 28. 2020

청첩장의 미학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일의 기쁨과 슬픔』은 그 제목이 암시하듯이 일상적으로 ‘일’을 하며 근로를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분히 일상적으로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은 참으로 담담하고 기쁘며, 슬프고 모순적이다.

 첫 번째 단편인 <잘 살겠습니다>는 이러한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흐름을 가장 먼저 알리고 시작하는 작품이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 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 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p28


 ‘나’는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살아왔다. 소위 말하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를 토대로 자신의 스펙을 쌓아왔고 그 노력의 결과로 원하는 회사, 원하는 직무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그녀에게 빛나 언니는 의아하면서 불쾌한 존재이다. 그녀는 ‘주는 대로 받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무지한 존재임에도 그녀와 같은 선상에 놓이는 동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안타까운 이유는 ‘ 냉정하게 말하는 것처럼 그녀의 세상이 공정한 사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 말하는 사회가 냉정하게 비춰질  있으나, 사실 ‘ 말하는 사회는 다른 관점에서 이상향이다. 주는 대로 돌아오는 세상이란 것이 얼마나 공정하고 공평한가.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와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이 보장되는 사회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가 살고 있는 세계와 생각하는 세계는 바로 이 지점에서 괴리가 발생한다.


 셋, 하던 그 순간. 나는 구재와 내가 외치는 숫자의 앞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만원. 정확히 천삼십만원 차이였다. 나보다 세전 기준 천삼십만원을 더 받는 구재는 당연히, 모아놓은 돈도 나보다 훨씬 많았다. 구재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자 자기도 민망했는지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이년 동안 백오피스에 있어서 그랬나봐.”

그래, 그게 맞는다고 치자. 그렇다면 나는 왜 이년 동안 거기에 있었을까. 이력서에 빼곡했던 내 모든 경력이 전략기획팀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p27


 ‘나’는 빛나 언니의 청첩장에 썼다. “십년 뒤에 우리 더욱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요.” 그리고 그녀에게 줄 축의금을 정확히 산출한다. 서로 주고받은 밥값을 제외하고 남은 금액은 12,000원. 그녀에게 세상의 이치를 똑똑히 알려주려 했는데, 11,000원짜리 핸드크림과 가격을 채우기 위한 카드에 빛나 언니는 눈물을 흘린다.

 ‘나’와 빛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나는 왜인지 소설을 읽은 이후로 걱정이 되었다. 과연 세상 물정 모르는 빛나가,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돌려줘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빛나가 잘 살 수 있을까. 노력을 하면 합당한 결과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가 잘 살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부디 빛나가 잘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제목처럼 일(work)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 있다. 표제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의 갑질 회사에서 월급을 포인트로 받는 거북이알이나, <다소 낮음>의 효율성 낮은 냉장고처럼 살아가는 밴드 뮤지션, 현실의 기로에서 PD라는 꿈 대신에 회계팀에 취직한 <탐페레 공항>의 ‘나’ 등. (특히,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의 아메리카노 마시는 신입사원은 정말 귀엽다.)


 하지만 이 소설집이 일에 대한 고충만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일에 얽혀 있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낯설지 않다. 사회를 모르고 관계에 서툰 인물들, 그리고 시스템의 부조리에 피해를 받는 이들은 마치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 같다.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세상의 이치들은 물음표로 돌아오고, 우리는 답을 얻기 위해 모른 척 묻어두고 있던 것들을 서랍 속에서 꺼낸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뻤다. 방송국이고 피디고 뭐고 지긋지긋했다. 대신 4대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와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p207


 <탐페레 공항>의 ‘나’는 PD의 꿈을 포기하고 회사에 취직해 안정적으로 살아가지만 우연히 보게 된 신입 피디 채용 공고에 이력서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녀는 ‘인생에서 후회되는 경험과 그 이유를 기술하시오.’ 라는 문항에 노트북을 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p209


 비록 ‘나’가 노트북을 꺼버렸지만 절망적이지는 않다. ‘나’가 했던 모든 행동이 후회로만 남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잊고 있던 편지를 다시 꺼내든다. 탐페레 공항에서 함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노인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너무 늦지 않게 답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탐페레 공항> 다른 층위에서의 기쁨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일상을 살아간다. 자신이 원했던 미래가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 서랍 속에 묻어놓은 편지처럼 늦은 답장이나마   있다는 .

 이 소설집은 <잘 살겠습니다>하고 선언한 모두에게 잘 살기를 바란다고 응원을 보내준다. 그것이 위로가 되고 감동이 된다. 잘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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