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신고 뒤에 숨었을 가능성과 트로트 한 구절이 준 힌트
“서울경찰청 긴급 신고 112입니다”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의 애원이란다. 가는 세월 잡을 수는 없지 않으냐~~~.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갔느냐~~~”
“여보세요? 말씀을 못 하실 상황이면….”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경찰관이 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
지난 11월 17일 오후 3시 20분께였다. ‘코드 1’, 내용 확인 불가능하다는 112신고가 접수됐다. 신고자의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다. 휴대전화의 위치 추적을 통해 주변으로 출동했다. 순찰차 안에서 신고 내용을 들었다. 112신고를 접수하는 경찰관이 여러 차례 질문했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이럴 때는 둘 중 하나다. 신고한 뒤 말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거나 휴대전화에 등록된 긴급전화 버튼이 잘못 눌린 경우다. 하지만 현장에 출동할 때는 무조건 위급한 상황을 가정하고 출동해야 한다.
112로 신고했지만 말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집에 혼자 있는 여성이 도둑을 의심할 때처럼, 바로 옆에서 누군가 위협하고 있을 때처럼. 이런 상황을 떠올리면 침묵이 오히려 신호가 되기도 한다. 말이 없어도 호흡 하나, 미세한 소음 하나가 단서가 되곤 한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다. 몇 달 전에도 112로 전화를 한 뒤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처음 신고한 때부터 위치가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납치가 됐을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현장에서 대응했다. 그러다 휴대전화의 위치가 지하철 노선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한 뒤 신고자와 통화를 시도했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함부로 신고자에게 전화하지 않는다. 경찰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이 더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분 동안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진행하고 있는 지하철역 몇 정거장 앞까지 경찰관들이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신고자가 하차하는 곳에서 경찰관을 만나 신변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무리되었다.
112로 신고를 한 뒤에 아무 말이 없을 때부터 대응 방법은 일반적인 신고 상황과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신고를 접수하는 경찰관이 말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해 몇 가지를 확인한다. 그리고 위급한 상황인지를 판단한다. 경찰관이 확인하는 방법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범죄에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위급한 상황에서 말할 수 없을 때도 음성이나 문자로 신고해도 경찰관이 바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니 안심하고 침착하게 신고해도 된다.
이번 신고도 그랬다. 최초 신고를 접수하는 경찰관이 여러 가지 질문과 반응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나는 30여 초 동안의 신고 내용을 집중해서 들었다. 주변에 작은 생활 소음을 듣고 신고한 장소를 특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출동하는 순찰차 안에서 자세하게 듣는다는 게 쉽지 않았다.
다만 라디오인지 실제 음성인지 알 수 없지만 수화기 멀리서 트로트 노랫말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반복해 가며 신고자의 장소를 추측했다. 그러는 사이 순찰차는 신고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도착했다.
휴대전화의 위치는 우리가 흔히 쓰는 길 안내(내비게이션)와는 다르다. 흔히 말하는 와이파이(Wi-Fi)와 셀(모바일 데이터)에 따라서 좁게는 몇 미터에서, 많게는 500여 미터 이상의 차이가 발생할 수도 있다. 세부적으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지만 단순하게만 보면 그렇다.
큰일이다. 도착한 곳은 관내에 있는 대형 아파트 단지다. 이곳을 모두 수색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함께 출동한 후배 경찰관과 고민에 빠졌다. 어떤 방식으로 어디부터 수색 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수화기 너머 들었던 노랫말을 생각났다.
‘청춘을 돌려다오’라는 트로트를 듣거나 부른다는 것은 나이대가 어느 정도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수화기 가까이서 들린 게 아니고 멀리서 들렸다는 건 공간이 꽤 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도 특정 장소로 추정할 수 있는 몇 가지 힌트가 있었다. 제일 먼저 가 볼 곳이 좁혀졌다.
내가 향한 곳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경로당’이었다. 80미터를 걸어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바람 찬 늦가을 오후, 낙엽 사이를 지나 도착했다. 1층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닐곱 분의 할머니들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앉아 있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경찰관입니다. 혹시 휴대전화 끝 번호가 1234인분 계세요?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요”
멀리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우리를 유심히 쳐다봤다. 그리고 옆에 계신 할머니를 바라보면서 한마디 말을 건넨다.
“아니 조금 전까지 계속 전화 울리던데, 전화번호 뭐예요?”
“나…?”
“어르신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내 번호? 까먹었네. 딸년 전화번호는 아는데 내 번호는 모르겠어.”
“제가 전화 한번 걸어볼게요. 전화 울리는지 보세요”
그때였다. 할머니의 전화기 액정이 번쩍거렸다. 안도하는 순간이었다.
“제가 계속 전화했는데 왜 전화 안 받으셨어요? 모르셨어요?”
“아니 뭔 전화가 오는 것 같긴 했는데 우리 딸이 모르는 번호는 절대 받지 말라고 신신당부해서…. 요즘 보이스피싱이다 뭐다 하도 흉흉하잖아”
그렇게 말하는 할머니를 탓할 수 없었다. 아니다. 어찌 보면 잘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어머니께 그렇게 말한다.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로 전화가 오면 그냥 받지 말고 무시하라고 말이다.
결국 이번 신고는 해프닝으로 끝났다. 20여 분 동안 심장에서 울리던 긴장과 집중이 한순간에 풀릴 때 느껴지는 허탈감이 있다. 그러나 그 허탈함조차 ‘다행’이라는 안도감에 금방 묻혀 버린다.
요즘은 휴대전화 문자를 통한 112신고도 많다. 그마저 쉽지 않다면 번호만 누른 뒤 접수하는 경찰관의 안내에 따라서 반응만 해도 신속하게 경찰관이 출동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긴급 전화번호 112나 119가 잘못 눌렸다면 바로 전화해 신고를 취소해 줬으면 한다. 단순한 실수 하나로 눈앞에 보이지 않는 많은 경찰관이나 소방관이 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대로 복귀하는 순찰차 안에서 그제야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가로수 낙엽이 대부분 땅에 떨어져 아스팔트와 인도 사이에 어지러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 출동하면서 집중해서 들었던 노랫말이 문득 떠오르며 미소가 지어졌다.
“지나간 그 옛날이 어제 같은데…. 가는 세월 막을 수는 없지 않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