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지금 나는

더 살려고 노력 중입니다.

by 김수기

25년 10월 말, 항암이 끝나고 메스꺼움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머리카락이 빠지긴 해도 가발을 사용할 만큼은 아니었고 몸의 온도는 36도를 벗어나지 않았고 손발에 땀이 나지 않아 거칠어지고 특히, 발바닥은 허물이 벗겨지기도 했다. 흉부외과선생님께서는 항암결과가 좋다며 여행도 다녀도 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서울에 더 머물기로 했다. 내게 필요한 가정의학과 의원, 000 유기농야채 판매소, 걷기에 좋은 한강둘레길 코스, 심지어 몸전신순환을 위한 마사지집까지 파악을 했다. 내가 사는 P시에 가기 전에 누군가 암환자를 위한 요양병원을 추천했건만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양병원에서 한다는 의료치료를 비롯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참고를 했다. 항암후유증으로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느껴서 가정의학과 의원에서 면역 주사를 1주에 2번 맞았다. 물론 치료제가 아니고 보조제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심리적으로는 많은 도움이 되어 힘이 났다. 고용량 비타민 주사도 맞고 피검사를 하여 백혈구, 적혈구, 염증 등 각종 수치를 파악하여 내 몸의 상태를 알아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가정의학과 의사 선생님은 나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시는데 큰 도움을 주셨다.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일일이 물으며 다 들어주셨고 그때마다 따뜻한 마음을 보내주셨다. 내 평생 잊지 못할 내 편이 되어 주시며 에너지가 솟아나게 위로를 해주셔서 내가 용기를 내게 된 동기가 되었다. 아들 같은 젊은 의사 선생님 앞에서 펑펑 두 번이나 울었다. 그래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만큼 환자와 공감대 형성을 잘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식이요법을 항암 중인 9월 초부터 시작하였다. 종양내과선생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골고루 다 먹으라고 했다. 수술 후 항암 전까지 난 육식, 야채식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다 먹었다. 그러다가 완전 관해 판정을 받으신 분들의 사례를 읽어보니 대부분 채식으로 식이요법을 하신 것이었다. 나도 채식위주로 노선을 변경해 보기로 하였다. 브로콜리, 양배추, 케일 등을 비롯하여 몇 가지 야채를 살짝 데쳐서 푸르륵 갈아서 먹었다. 그랬더니 변비가 하루 만에 해결되었다. 두유기를 사서 서리태로 무가당두유를 직접 만들어 먹고, 당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키위와 블루베리, 체리를 먹으며 혈당수치에도 신경을 썼다. 당뇨환자가 재발이 쉽게 된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12월 중순에 실시한 피검사 결과, 염증수치 0.03을 비롯하여 백혈구, 적혈구, 당화혈색소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정상범위였다.


12월 17일, 우리는 짐을 싸서 P시로 내려왔다. 6개월 만에 보따리 싸서 집으로 오는데 난 이상하게 오기 싫었다. 기차를 타고 오는 도중 옆자리에 앉은 남편은 기분이 정말 좋아라였다. 내가 병원도 가깝고 아이들도 가까운 서울근교로 이사하자고 하니 그러면 자기와는 따로 살자고 했을 만큼 서울을 싫어한 사람이다. 거의 일주일을 집안 정리하느라고 몸을 움직였더니 팔이 심하게 아팠다. 여기 P시에서도 다시 가정의학과 의원을 찾아서 다니기 시작했다. 주 1회 면역주사를 맞고 피검사를 하며 몸 상태를 체크 중이다. 거의 매일 왕복 1시간 30분 걸리는 아파트 뒷산 코스를 걷고, 저녁 식사 후 학교 운동장을 30분 걷고 온다. 몸의 온도를 올려준다는 전신 마사지를 받고 내복까지 챙겨 입으며 체온 올리기에 신경을 썼더니 드디어 지난주 병원에서 체온이 36.5도까지 나왔다.


가끔은 죽처럼 보이는 녹색의 야채 스무디를 먹으며 헛구역질을 하는 내 모습을 내가 보며 아, 이렇게 꾸준히 살아야 하나 싶을 때가 있다. 암이란 완전 치료가 없다고 했다. 평생을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 앞일은 모르지 않은가?

[가시나야! 니가 아프기는 와 아프노?] K시에 사는 고교단짝 친구가 유정란 2 통과 전복죽을 끓여서 우리 집에 오자마자 한 말이다. 그러게. 내게 와 암이 찾아왔노.

뭐 먹고 싶냐고, 뭐든지 말하면 지가 해준다고 했다.


그렇지, 50년 되어가는 고등학교 단짝 친구 가시나의 한마디가 나를 살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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