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바나나
비싼 과일?
고급 과일?
이라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건 아직도 내겐 바나나다.
바나나.
흔하디 흔한 과일이 되어버렸지만, 삼천 원쯤이면 한 송이 거뜬하게 살 수 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 바나나는 내겐 비싼 과일의 대명사다.
아이에게 가장 비싼 과일 하면 엄마는 바나나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했더니
앤디 워홀의 바나나? 한다.
그래, 그 그림이 비싸긴 하겠지.
아이가 알 리가 없지. 매대 가득 쌓인 바나나와 땡 처리 바나나를 보며 커 왔으니.
“내일 소풍날인 거 알지? 준비물은 도시락과 간단한 간식이다. 시간 늦지 않게 오도록.”
내일이 소풍임을 알리는 마법 같은 주문이다. 다들 마음이 급해진다. 무슨 과자에 어떤 음료를 사 갈지 고민 중이다. 어떤 옷을 입을지, 또 어떤 장기자랑을 준비할지 벌써 분주한 아이들도 있다.
소풍? 사실 소풍을 좋아하지 않는다. 땡볕에 거기다 흙먼지에, 좁아터진 버스를 타고 동물원이니 식물원이니 하는 게 뭐가 재미있을까 만은 그래도 수업보단 낫다는 그 행복감. 그리고 친구들과 도시락 먹는 재미?
사실 내게 소풍날이 더 특별했던 건, 아마 엄마 덕분일 거다.
소풍이면 엄마가 시장에 가서 사 오셨던 바나나. 소풍의 특권이었다.
과자 한두 봉지에, 음료수 두 개 정도, 그리고 엄마가 흥정하며 고른 바나나 두 개.
김밥 도시락 하나와 과자랑 음료수, 그리고 정말 조심스럽게 넣어 가던 바나나다. 혹여 바나나에 멍이라도 들까 봐, 소풍가방 여기저기에 넣어보고 다시 꺼냈다가 하던 기억이 난다.
두 개의 바나나는 찐 행복이었다. 노랗고 달콤하고 껍질조차 부드럽던 그 바나나, 너무나 이국적인, 매번 보는 동그란 과일이 아닌 길쭉한 데다 색깔조차 세련된 노랑, 그리고 언니들이며 오빠며 하나쯤은 놔두고 가라며 깔깔거리던 그 즐거움이다.
소풍 전날이면 왜 그리 잠도 잘 오지 않던지, 비몽사몽 잠에서 깨선 소풍가방을 다시 또 보곤 했다. 그러다 조금 일찍 시작된 엄마의 도마 소리, 그 도마에서 길쭉한 햄이랑 어묵이랑 맛살이 잘리고, 소금물에 선명하게 데쳐진 시금치가 참기름 냄새를 풍겼다.
소풍은 나만의 즐거움은 아니었다. 오 남매들의 김밥 먹는 날, 보통 서른 줄은 말았던 기억이 난다. 오 남매는 매 번 다른 날 소풍 가길 기다렸고, 엄마는 모두가 같은 날 소풍 가길 바랐다.
초등학교 1학년, 김밥 도시락 옆에 얌전하게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놓여 있던 바나나 두 개, 그때가 바로 내 바나나의 시작이다.
아무 특별한 날이 아님에도 척척 바나나를 통 크게 사는 날 보면, 이쯤이면 출세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