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비상계엄과 한국 민주주의 회복력-
지난 14일의 시간은 비현실적인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훗날 역사책은 이 비현실적인 순간들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시민들의 시각에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기록되길 바랄 뿐이다.
12월 3일 밤, 학교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같이 있던 동료가 조용한 침묵을 깼다.
‘대통령이 계엄을 발표했는데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표현이기에 그 표현을 이해하는데 애를 먹었다. 정신을 차리고 동료와 함께 유투브에 비상계엄을 입력했다. MBC 뉴스에서 정말 ‘윤석열 대통령 비상계엄’이라는 실시간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상황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내가 지금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그런 와중에 친구 기자로부터 받은 정보가 헌법 77조 5항의 계엄 해제 내용이었다.
⑤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계엄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지금 이 비상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회밖에 없었다. 무작정 학교에서 나와 국회로 출발했다. 그 시각이 약 11시 15분경이었다.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고 있는 유투브 방송들을 보면서 국회로 향했다. 11시 30분경, 서강대교를 건너는데 왼쪽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비상계엄이 현실이라는 걸 체감했다. 주차를 하고 국회 정문으로 달려가보니 이미 수많은 시민들이 경찰,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많은 시민들이 군인은 물론 군용 차량과 맞서면서도 계속해서 주변에 알리며 더 많은 사람들이 국회로 달려오도록 연락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다행히 비상계엄 선포 2시간 30분 만에 국회는 계엄 해제 요구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2주가량이 지난 지금도 그때 시민들이 보여준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용감했다. 그 시민들은 그 순간부터 한국의 무너진 민주주의를 스스로 지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과 열흘 만에 12월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냈다. 12월 3일 자정부터 시작된 하루하루가 너무도 긴박하게 이어져 지난 10일의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지지만, 전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군대를 동원한 독재 정권의 비상계엄에 맞서 시민들이 단 한 명의 인명사고 없이 비상계엄을 막고, 그 대통령을 법의 테두리 하에서 탄핵시킨 사례는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과연 유럽 각국의 외신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영국의 대표적인 정론지인 가디언(Guardian)은 14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한국 대통령이 자신의 몰락을 스스로 확정한 방법’(How South Korea’s president sealed his own downfall)이라는 제목으로 분석기사를 보도했다. 이 기사는 1차 탄핵이 국회에서 부결되고 국민의힘이 소위 질서 있는 퇴진의 기회를 주었음에도 왜 윤석열 대통령은 스스로 도박을 선택했는지 분석했다.
이 보도가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이번 탄핵이 지난 3일 비상계엄이라는 잘못된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간 윤석열 대통령이 보여준 실정(失政)의 연장선에 있다고 강조하는 부분이다. 즉,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시작부터 문제가 많았고, 이번 계엄이 그 정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 가디언 기사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는데, 그것은 바로 윤석열의 등장과 퇴장에서 윤석열과 여성, 특히 젊은 여성 시민들과의 대립이다.
윤석열이 지난 2022년 3월 대선에서 가까스로 승리했는데, 이미 그때부터 윤석열은 우리 사회의 분열을 일으키는 인물(divisive figure)이었다. 당시 윤석열은 한국 여성들은 더 이상 차별을 받지 않는다며 젊은 남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윤석열 당시 후보는 선거 승리만을 위해 의도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갈라 치면서 우리 사회를 분열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에 가디언은 윤석열이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미 극단적인 보수주의자(arch-conservative)였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기사는 비상계엄 선포 후 지난 열흘 간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시위의 성격이 한국의 젊은 세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세월호. 이태원 참사와 같은 국가적 트라우마를 경험한 젊은 세대가 나이 든 남성들이 주도하는 국가 시스템(a state run by older men)에 희망을 잃고 거리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저항의 상징으로 K팝 응원봉을 들고 거리에서 나왔는데, 그 젊은 세대 가운데 특히 젊은 여성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강조했다. 결국, 젊은 남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여성들을 배제했던 윤석열. 윤석열은 그 여성들에 의해 탄핵을 당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독일의 대표적인 국제뉴스 매체인 도이체벨레(Deutsche Welle)는 이번 윤석열 탄핵과 관련해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분석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의 제목은 ‘북한은 남한의 정치적 혼란에 어떻게 대응했는가(How North Korea responded to South's political turmoil)’이다. 이 기사에서 주목하고 있는 점은 지난 3일 윤석열이 충격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후 북한에서 평소와 달리 매우 느린 반응을 보인다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그간 북한은 남한의 이러한 내부 문제를 재빨리 포착해 남한 체제의 부패와 무능을 강조하며 북한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보도를 일삼았다. 도이체벨레는 남한에서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일주일이 지날 동안 북한이 이례적으로 침묵을 이어갔다는 점을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윤석열의 이번 계엄은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해 사회 곳곳에 북한을 따르는 종북주의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점을 계엄의 정당성으로 삼은 것을 고려하면, 북한의 이 같은 태도는 사뭇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도이체벨레는 크게 3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첫째는 북한 내부의 두려움이다. 북한이 만약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그에 따른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 사태를 보도할 경우, 북한은 인민들의 내부 소요 사태를 우려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그만큼 내부 체제 안정성에 신경을 쓴다는 지적이다. 둘째, 남한의 군사 도발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는 국회에서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것으로, 북한은 윤석열 정부가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남한 시민들의 관심을 의도적으로 외부로 돌리기 위해 북한과의 군사 도발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이에 북한은 남한의 비상계엄과 관련된 보도를 자제하고 남한의 내부 동향을 살피며 남한의 군사 도발 가능성을 대비하는데 집중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보다 근본적인 관점으로 이제 북한은 남한을 그저 다른 국가('just another country')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고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그러면서 조선중앙통신을 비롯한 북한의 국영 언론들이 남한 관련 보도를 지속적으로 줄이고 있는 추세다. 이는 북한은 이제 더 이상 남한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으며, 한민족 혹은 통일의 대상이 아닌 그저 다른 나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도이체벨레는 이례적인 북한의 반응이 지난 2023년 말에 한국을 교전국(belligerent state)이며, 향후 북한과 남한은 ‘적대적인 두 국가’(two hostile states)임을 명시한 헌법 개정 발표와 상관있다고 분석했다. 즉, 북한은 이제 남한을 동질적 민족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는 단계적 변화에 있고, 이번 보도양태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지난 2주간 우리는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위협이 아닌 실제 생존의 위협을 느꼈다. 동시에 무수히 쏟아지는 뉴스들을 소화하느라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탄핵을 한 걸음 뒤에서 볼 수 없었다. 위 두 기사는 이에 대해 우리 언론이 말하기 힘든 그들의 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보다 주를 이루는 내용은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resilience)에 감탄하는 기사들이다. 예를 들어,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IPS(International Politics and Society)는 지난 12월 3일 밤 계엄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가장 큰 시험에 직면했지만, 2시간 30분 만에 의회에서 계엄을 해제하며 의회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그 한국의 민주주의가 그런 회복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190명의 국회의원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단호하게 행동한 덕분이라고 강조한다.
소수의 기득권과 정치권력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수렁으로 빠트렸으나, 다수의 시민들이 거리에서 수렁에 빠질뻔한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살린 것이다. 며칠 전 어떤 교수가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이후 이어진 대통령실의 대응을 보며 앞으로 도대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어떻게 외교를 해야 하냐며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이에 나는 내가 만약 일선에 있는 외교관이라면 상대 외교 파트너를 아래와 같이 설득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지난 반 세기가량 어렵게 만든 한국의 민주주의가 지금 큰 위기 봉착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로 인해 한국과 오랫동안 민주주의, 인권, 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이어가던 많은 파트너들이 한국과 외교관계에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한국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에 의해 발전했고, 이번에도 시민들에 의해 발전될
것입니다. 비록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의 민주주의는 부침이 커 보입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장점은
수많은 시민들의 희생과 저항으로 만들어졌고, 지금도 그들에 의해 발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위기를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다시 한번 발전할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아닌 한국의 깨어있는 시민들을 믿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