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에서 밤 10시 즈음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휴대폰 스크롤을 하염없이 내리며 숏츠와 릴스를 봤을 텐데, 그날은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새벽 3시 즈음 잠에서 깼다. 다시 잠이 오지 않고 달리 할 건 없었다. 무의미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휴대폰을 보기도 했고, 가만히 누워서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했다.
최악이야. 객관적으로, 인간으로서 정말 별로인 사람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장점이라곤 없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종종 내가 그 사람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사랑의 크기가 생각보다 커서 새삼 놀란다. 아무리 싫고 귀찮은 일도 그 사람이 원하면 들어주었다. 그 사람은 종종 내가 싫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부탁한다.
부탁을 들어줄 때 나는 말했다. "정말 싫은데, 사랑하니까 해주는 거야." 그 사람의 삶에 곤란하거나 힘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랐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주 특수한 희생을 하는 거라는 걸 명확히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냐면, 만기를 한 달 앞둔 적금을 깬 적도 있다. 믿고 사랑하니까, 귀찮음과 속 쓰림은 감내할 수 있다. 나에게 사랑은 불편을 감수하고 무언가 해주는 것이다. 수명 몇십 년, 간이나 콩팥 같은 장기 정도는 때어줄 수 있는 것이다. 아주 멋대가리 없는 정의지만 그 사람을 통해 내가 느낀 사랑은 그렇다.
얼마 전 그 사람은 나에게 큰 잘못을 했다. 선을 넘고, 내가 스스로를 의심하고 불안하게 했다. 그 사람은 내게 수없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잠깐 미쳤다며, 절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손가락을 내밀었다. 나의 세계를 어지럽힌 것을 진심으로 사과했다.
나는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 사람을 용서하며 생각했다. 아, 나는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는구나.
정확히 이틀 후, 그 사람은 내게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정도로 형편없을 리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토록 나를 무시할 리 없다. 다시 그러지 않겠다 손가락 걸고 약속했는데, 뭔가 잘못되었다.
누군가에게 고래고래 소리 지를 일이 살면서 얼마나 될까. 전화기 너머 그 사람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몇 주 간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그 사람을 미워하다 보니 오전 6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창밖을 보니 이미 날이 밝았다. 그날은 객실 체크아웃을 해야 하는 날이었다. 양양에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이틀 숙박 연장을 하고 남은 날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한다. 일단 속초에서 섭국이 먹고 싶다. 양양에도 섭국을 파는 식당이 많지만, 딱 속초 그 가게의 섭국이 먹고 싶다. 다른 음식은 입에 넣기 싫다. 이럴 때 차가 있으면 훌쩍 다녀올텐데 나는 차도, 운전면허도 없다. 시외버스를 찾아본다. 이른 오전 버스 티켓은 매진이다. 속초에 도착하면 점심 때는 될 것 같다.
다행히 난 바쁘다. 예기치 않게 길어진 여행으로 여벌 옷을 손빨래하고, 세수를 한다. 속초 시내에 갈 테니 가볍게 화장도 한다. 입을 옷은 후드티에 고무줄 바지뿐이지만 정성스레 외출을 준비한다.
빨래를 마치고 외출 준비를 하던 중 침대 위로 햇빛이 쨍하게 쏟아진다. 오전에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날이 개었다. 버스가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지만 산책 겸 일찍이 객실을 나선다. 바다가 가까우니 산책할 맛이 난다.
밖에 나선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빗방울이 떨어진다. 나갈 때만 해도 하늘이 너무 맑아서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오전 9시엔 문을 연 카페도 없다. 근처를 두리번거리는데 미용실이 하나 있다. 오픈 시간이 8시 30분이라고 적혀있다. 창 너머 조명이 환하고 OPEN 팻말이 걸려있다.
마지막에 미용실에 간 건 두 달 전이다. 버스가 오려면 1시간이나 남았는데, 머리를 다듬으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것 같다. 쭈뼛거리며 들어간 미용실은 머리를 만지는 사장님의 손길과 그 사이사이 나눈 말들이 좋았다. 사장님이 '나'보다 '나의 머리카락'에 관심이 쏠려있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이발을 마치고 사장님은 정성껏 드라이를 해준다. 생머리를 구불구불 예쁘게 말아준다. 사장님은 "아직 손님이 없으니까.." 중얼거리며 헤어스프레이와 고데기까지 꺼낸다. 뒤이어 손님이 들어왔는데, 손님이 없었으면 버스 시간까지 뭐라도 더 해줬을지도 모른다.
미용실을 나설 때 나는 별안간 후드티에 백팩을 걸치고 머리를 멋지게 세팅한 사람이 되었다. "머리를 예쁘게 해 주셨는데 옷이 이래서 아쉬워요." 사장님은 연신 머리를 매만지며 말한다. "뭐 어때요. 기분전환이죠." 사장님은 계속 머리를 매만지며 혼잣말처럼 말한다. "음, 예쁘네." 사장님은 내가 아닌 내 머리에 집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만든 작품이 나도 마음에 든다.
"감사해요. 꽃단장하고 시내 다녀올게요." 사장님이 웃으며 잘 다녀오시라, 한다.
예쁘게 구불거리는 머리를 하고 속초로 갔다. 먹고 싶던 섭국을 맛있게 먹었다. 바닷가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카페에서 그 사람과 함께 놀던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작년 여름에 함께 속초에 왔었지. 한여름 속초 바다는 아름다웠다. 성인이 된 후 바다에 몸을 담근 적이 없는데, 아주 오랜만에 머리까지 푹 담가가며 물놀이를 했다. 그 사람은 내게 수영을 가르쳐주었고, 우린 누가 들을까 부끄러울 정도로 유치하고 실없는 농담을 하며 배를 잡고 웃었다.
여행이 길어지자 가져온 책이 똑 떨어졌다. 시내에 온 김에 문구점에서 공책도 사고, 서점도 들렀다. 책 두 권을 사고 카페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마셨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미워하느라 정신을 못 차렸는데 거짓말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우울한 사람이 있다면 미용실에서 머리를 세팅하거나, 메이크업을 받아보라고 권해야지 생각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하고 맛있는 걸 먹고 돌아다녀보라고. 혼자 하기 뭣하면 같이 예쁘게 꾸미고 칵테일바던, 국밥집이던 가자고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을 것 같다.
저녁거리를 사러 속초중앙시장에 갔다. 머리가 멋지게 꼬불거린 탓일까? 시장에서 한 꼬마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어머, 얘가 왜 이래. 왜 모르는 사람을."
아기들은 왜 이렇게 귀여울까. 안녕, 웃으며 인사하니 배시시 웃어준다. 아이 엄마가 웃으며 말한다. "아유, 언니가 마음에 드는구나!" 내 나이 서른 하나. 아기들한테 언니, 누나가 아닌 이모로 불린 지 좀 되었는데, 역시 머리가 멋지게 꼬불거리니 언니 소리를 듣는다.
양양에 돌아왔다.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너무 미웠는데, 몇 주 동안 미워서 얼굴도 안 봤는데, 그동안 너무 모진 말을 쏟아낸 것 같아 미안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 말은 하지 말걸, 후회했다. 오늘 미용실을 갔던 일도, 함께 갔던 속초 바다를 다시 봤던 일도, 시장에서 귀여운 아기를 만난 일도 모두 얘기하고 싶었다.
자존심이 있지 지은 죄에 비해 너무 빨리 용서하는 게 아닌가 고민했다. 아니면 내가 용서했다는 사실을 좀 더 나중에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했다.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에 속 끓이고 있을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졌으면 좋겠다.
숙소에 돌아와 그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지금 양양인데, 당신을 용서하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 짓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긴 미움이었다. 미워하는 사람도 미움받는 사람도 힘든 시간이었다. 양양에 더 머물지 않았으면, 속초를 다녀오지 않았다면, 미워하는 마음이 더 오래갔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을 미워하며 알게 된 건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잘 미워하고, 잘 용서하는 방법을 계속 고민하는 이유다. 앞으로 더 정확하게 분노하고, 짧게 미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번 미움은 조금 길었다.
그 사람과 다음엔 양양에 함께 가기로 했다. 사실 그 사람은 바다보단 산과 계곡을 좋아한다. 해물보단 고기를 좋아한다. 그래도 휴가가 생기면 꼭 바다에 가자고 한다. 자긴 좋아하지도 않는 조개구이와 회를 매 끼니 같이 먹어준다. 정말 별로인 인간이라고 한 말은 취소한다.
아무튼, 용서하고 사랑할 결심을 한 그날 깊은 잠을 잤다. 용서할 사람과 사건들이 조금 밀려있지만 앞으로 차차 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