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다녀오니 살이 좀 쪘네

by 정의로운 민트초코

강화도에 다녀왔다. 터미널로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함께 버스를 기다리던 노부부가 말을 건넸다. 외진 곳에서 외지인을 만나 반가운 기색이었다. 양손 가득 반찬을 싸들고 서울에 사는 딸에게 가는 길이라 했다.


- 대학생인가?

-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며) 어유, 아니에요. 저 서른한 살이에요.

- 어유, 학생인 줄 알았네. 인상이 너무 좋네!

- 핫, 감사합니다.


인상이 좋다는 말이 좋았다. 심보가 고약하지 않고 편안해 보인다는 말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버스가 왔다. 노부부는 버스에 올라타며 말한다.


- 복스럽게 생겼네, 아주.


복, 스, 럽, 다...


서울로 가는 버스에서, 복스럽게 생겼다는 말을 곱씹고 말았다. G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깔깔 웃는다.


- 어르신들한테 복스럽게 생겼다는 건 최고의 칭찬이야.

- 전에 우리 할머니는 나한테 얼굴이 달덩이 같다고 했어. 언제는 또 보름달 같다고..

- 그건 진짜 극찬임.


그래도 심란하다. G에게 묻는다.


- 나 요즘 살쪘어?


G가 내 얼굴을 살핀다.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G는 빈말을 못한다. 빈말은 거짓말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얼굴이 부으면 부었다고, 살이 찌면 쪘다고, 옷이 안 어울린다, 머리를 어떻게 해봐라, 꼭 말을 해주는 사람이다.


- 흠, 안 쪘어.


G의 별명은 진(실의)주(등아리)다. 진정성이 느껴진다.


- 그래? 참, 아까 그분들이 나 대학생 같다고 했어.

- 대학생이 다 20대 초반은 아니고.. 고학생도 있는 법이니까...




사실 퇴사 후 살이 쪘다. 마지막 건강검진 때 보다 2kg 정도 늘었다. 다른 사람이 알아볼 정도는 아니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 여유롭던 바지 허리춤이 약간 조여 온다. 나이 탓도 아니고, 물만 먹어도 찌는 체질이라서 찐 게 아니다. 찔 만해서 쪘다.


여행을 많이 다녔다. 특히 3월엔 집에 있던 날 보다 여행지에 있던 날이 더 많다. 여행을 다녀오면 늘 살이 쪄서 온다. 여행을 가면 아무래도 매 끼니 사 먹는다. 사 먹는 음식은 짜고, 기름지고, 양이 많다. 여행을 왔다는 해방감에 술도 홀짝홀짝 마시고, 안 먹던 야식도 먹는다.


여행지에서 난 보통 아침 일찍 눈이 떠진다. 삼시 세끼를 꼬박 챙겨 먹는다. 평소보다 많이 걸어서 금방 허기가 진다. 간식도 먹는다. 평소에 달달한 음료를 잘 안 마시는데, 여행만 오면 말차라테나 바닐라라테가 당긴다. 여행지에선 체중을 잴 일이 없다. 펑퍼짐한 후드티에 고무줄바지를 입고 다닌다. 제 아무리 하루에 3만보씩 걷고, 종일 자전거를 타고 다녀도 살이 빠져서 돌아온 적은 없다.


게다가 난 주로 혼자 여행을 다니는데, 관광지 식당 다수는 기본 2인분부터 주문할 수 있다. 대-중-소로 구분되는 단품메뉴도 소 사이즈는 대게 2~3인분이다. 혼자 돌아다니며 삼겹살 2인분, 해물전골 소 사이즈, 모둠회 소 사이즈를 잘 시켜 먹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종일 걷고 허기진데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싶지 않다.





직장인 시절엔 몸무게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았는데, 퇴사를 하긴 했나 보다.


굳이 날씬할 필요는 없다. 내가 건강하면 좋겠고, 마음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여행을 다니던 집에 누워있던 과하게 먹지 않고, 몸에 나쁜 음식 덜 먹고, 적당히 움직이고 햇빛을 보고 살면 좋겠다.

언젠가 G가 눈치챌 정도로 살이 찌면, G는 입이 근질거려 참지 못하고 내게 말해줄 것이다. 그럼 나는 배를 통통 두드리며 말할 것이다. 나도 알아. 두툼하고, 따뜻하고, 든든해. 살찌니까 좀 귀엽지 않냐.

아마 G는 굴하지 않고 계속 말해줄 것이다. 살쪘어. 부은 게 아니라 살이야.


다만 조금 방심하면 바지가 안 맞을 수 있다. 난 정말 쇼핑이 싫다. 백화점만 가면 현기증이 난다. 백수라 새 옷을 사기도 아깝고, 주로 언니 옷을 물려 입기 때문에 살이 찌면 곤란하다. 4월 봄바람이 따뜻하고 보드랍다.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집 근처 뒷산이 푸르고 아름답다. 당분간 담백한 집밥을 차려먹고 공원을 산책해야겠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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