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도에 대하여
영종도를 좋아한다. 지금까지 영종도에 몇 번을 왔는지 헤아려보다 포기했다. 다른 곳 좀 가볼까 하다가도, 영종도가 자꾸 생각났다. 숙소를 알아보고 교통편을 예매하기도 버겁다. 그렇게 다시 영종도에 간다.
영종도는 집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다. 여러 번 차를 갈아타야 하지만 버스나 기차를 예매하지 않아도 된다. 평일이면 1박 5만 원 내외로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 머물 수 있다. 오피스텔 형태의 생활형 숙박업소가 대부분이고 시설은 호텔이라기보단 아기자기한 자취방 같다. 호텔 수준의 시설과 서비스를 기대하지 않으면 좋은 선택지다. 무엇보다 내가 즐겨 찾는 숙소엔 커다란 빌트인 냉장고가 있다. 호텔 미니 냉장고에선 맥주가 차가워지지 않는다. 영종도에 호텔이 생겨도 나는 빌트인 냉장고가 있는 에어비앤비에 머물 것이다.
영종도 바다가 약간 칙칙한 것도 마음에 든다. 서해 특유의 흙탕빛깔에 바다 건너엔 푸르른 지평선이 아닌 공장과 고층 건물이 즐비하다. 나는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와 백사장을 보면 까무러칠 것 같다. 도파민이 과하게 나와서 살짝 버겁다. 봐도 봐도 아쉽고, 언젠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바다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겠다. 그런 풍경을 두고선 책도 못 읽고 글도 못쓴다. 너무 아름답고 좋다는 생각 이외에 다른 생각을 못하겠다. 당장 백사장을 거닐며 사진을 찍어야 할 거 같은 조바심이 난다.
서해의 밀물과 썰물, 일출과 일몰도 신비하고 경이롭지만 여기서 물장난을 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래서 영종도에선 바다를 곁에 두고 책을 펼칠 수 있다. 가끔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보면 적당히 행복하다. 바다 위를 노니는 갈매기를 보면 조금 더 행복하다.
그래서일까, 영종도에 갈 때면 '여기서 뭔가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겠다'라고 기대한다. 뭔가 결정해야 할 게 있을 때 영종도에 간다.
첫 직장에선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숨 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된 것처럼 호흡이 어색했다. 코로나인 줄 알고 몇 번이나 검사를 하기도 했다. 출근길에 자주 배가 아프고 식은땀이 났다. 지하철에서 종종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다들 이 정도로 출근이 끔찍한지, 힘들어도 참고 회사에 다니는 건지, 못 견디고 그만둔다면 난 나약한 인간인 건지 궁금했다.
첫 직장에서 나는 매일 조금씩 절망했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변할 수 없는 견고한 벽이 있었다. 내가 핸들링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는 사실, 대단히 특별한 줄 알았던 내가 사실 보잘것없고 아무 힘없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나날 속에 무너졌다. 싫어하는 사람들과 매일 일을 하고 같이 밥을 먹었다. 경멸하는 사람들을 웃으며 대했다.
큰 행사를 마친 어느 여름, 특별 휴가를 받았다. 영종도가 어딘지 잘 몰랐지만 마침 지인이 무료 숙박권을 줬다. 이틀간 구읍뱃터 근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오래오래 앉아 있었다. 혼자 아메리카노와 젤라또를 시켜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퇴사해야 했다. 커피와 젤라또를 먹으니 힘이 났다. 둘 중에 하나만 먹었으면 힘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먹고 싶은 메뉴는 모두 주문하고 싶다. 긴 휴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계속 일하고 싶다. 그래, 포트폴리오 잘 준비해서 이직하자! 그렇게 영종도로 짧은 휴가를 다녀온 후 사직서를 냈다. 퇴사 후 조금의 공백도 없이 이직했다. 왜 진작 그만두지 않았는지, 속이 다 후련했다. 결정할 힘을 준 영종도가 고마웠다.
그 후로 해마다 영종도를 찾았다. 혼자 가기도 하고 엄마와 가기도 했다. 1년에 한 번 가기도 했고 서너 번 가기도 했다. 5년 동안 좋아하는 카페가 사라졌고, 새로운 가게들이 많이 생겼다. 내가 커피와 젤라또를 먹었던 그 카페는 아직 그대로 있다. 사실 그 카페 음료는 정말 맛이 없다. 얼마 전 히비스커스차를 주문했는데 얼마나 비릿한 지, 차라리 티백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2년 전에 홍차를 주문했을 땐 티백 꽁다리를 자르고 잔에 퐁당 넣어줘서 왜 이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젤라또를 주문했을 땐 약간 녹은 젤라또를 받았다. 기계 문제로 젤라또가 좀 녹았다며, 대신 두 덩이를 넣었다는 넉살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숙소 문제도 있었다. 성수기 예약 시스템 상의 오류라던지,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청소 담당자 간 소통 문제로 한밤중에 누군가 객실에 들어오는(!) 문제가 있었지만 영종도를 미워하진 못했다(물론 적당히 잘 해결했다).
아직 가보지 않은 국내 여행지도 많다. 나는 유럽도 남미도 가보지 않았고, 아마 그곳을 좋아할지도 모른다. 대중교통 2시간 거리에 라오스가 있다면 영종도가 아닌 라오스에 갈 것이다. 난 형편껏 여행한다. 가진 돈을 다 털어 여행을 떠나거나, 몇 달간 세계를 누비는 과감한 선택을 아직 하지 못한다. 영종도는 내 형편에 맞는 여행지다. 내게 필요한 것들을 적당히 갖추고 있고, 불필요한 건 별로 없다.
영종도는 나를 압도하지 않는다. 더 먼 곳, 더 새로운 곳이 많지만 책과 노트북을 펼칠 수 있는 바다는 아직 영종도가 유일하다.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이고, 인천공항으로 가는 중간 지점인 이곳이 내겐 결정을 내리는 바다이고, 나를 압도하지 않는 바다이자, 내 형편에 맞는 고마운 바다이다. 올해도 영종도를 찾았다. 이상하게 종종 코 끝이 시큰했다. 이틀만 머물려고 했는데 아쉬워서 하루 더 머물렀다. 또 언제 오게 될지 모르지만 아마 그때는 내가 힘겨운 시간일 것 같다. 그때가 너무 빨리 오지 않으면 좋겠다. 영종도가 안온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