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할 땐 할랄가이즈

나의 가성비 넘치는 탈출구

by 정의로운 민트초코

전 직장 임원에게 연락이 왔다. 어떻게 지내냐며, 시간 될 때 통화를 하고 싶다며 카톡을 보내왔다. 가족과 식사 중이라 1시간 후에 전화하겠노라 답장했다.

퇴사 후 2년 반 만이었다. 재취업이나 알바 제안, 아니면 업계 동향을 캐묻겠거니 지레짐작했다. 상사로서 그를 싫어했지만 경멸했던 정도는 아니라 통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약속한 시간에 그에게 전화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내 기억 속 그는 아주 바쁘고 정신없는 사람이기에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 사이 어디 불려 갔거나 통화를 하고 있겠지. 역시 그는 통화 중이었다며, 두 시간 후에 전화하겠다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네, 많이 바쁘시죠. 가능하실 때 연락 주세요^^' 예의 다정하게 답장을 보낸다. 그리고 그는 내게 다시 전화하지도,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았다. 나도 그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직장 상사들은 나보다 중요한 게 많았다. (그들이 먼저 제안한) 나와의 회의, 면담, 식사 약속 등은 빈번히 후순위로 밀렸다. 그래도 언제나 착하게 '에구 바쁘시죠, 편하실 때 말씀해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기약 없이 기다렸다.

그들이 나를 후순위로 미룬 건 아마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고객사의 요청에 대응해야 하거나, 미룰 수 없는 급한 사안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도 1순위가 되지 못하는 내 존재와 위치, 마냥 기다려도 되는 존재, 약속이 지켜지지 못한 이유에 대해 별다른 설명이나 사과가 없어도 되는 존재로 여겨지는 건 지긋지긋하다.


그 익숙한 지긋지긋함에 부아가 났다. 어쩐지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탁 트인 바다가 보고 싶었다. 세면도구를 챙기고 숙박앱을 켰다. 내 화장대 서랍엔 바로 떠날 수 있도록 준비된 세면도구 파우치가 있다. 그럭저럭 며칠을 버틸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작은 파우치에 담겨있다. 그 파우치는 '나는 수틀리면 어디든 바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나름의 상징이다.

미세먼지가 아주 나쁘고 하늘이 흐린 날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날 여행은커녕 외출도 잘하지 않지만, 이제 난 흐린 날도 좋아한다. 최근 화양연화와 중경삼림을 본 덕분에 이전에 싫어하던 것-흐린 날, 비 오는 날, 스산한 거리, 번쩍거리고 붐비는 거리-에서도 낭만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숙박앱을 찾아보니 주말이라 숙소 가격이 평일보다 두 배는 비쌌다. 이 돈이면 코트를 한 벌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세면도구는 다시 서랍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평소보다 절반 가까이 저렴한 라오스 항공권을 발견했지만, 환율이 치솟았다는 이유로 그냥 침대에 누워있었지. 이 또한 지긋지긋하게 익숙한 내 모습이다.


여행용 세면도구는 서랍에 넣었지만 바람을 쐬고 싶었다. 후드티 대신 세미 정장을 꺼내 입었다. 화장을 하고 시계와 귀걸이를 찼다. 백팩이 아닌 숄더백을 꺼내 책 한 권을 챙겼다. 패딩 대신 롱코트를 꺼내 입고 향수를 뿌렸다.

일상이 지겨울 때 이태원에 가곤 한다. 이국적인 음식점과 온갖 잡동사니를 파는 상점이 즐비하고, 달뜬 얼굴의 여행자들이 가득하다. 이방인과 현지인 사이 어중간한 존재가 되어 시간을 보내기에 딱이다.


할랄가이즈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물도 돈 내고 사 먹어야 하는 게 역시 한국과는 거리가 멀다. 싱글세트에 팔라펠 토핑을 추가하니 2만 원이 넘는다. 한 끼 식사로 부담스러운 금액이지만 여행을 가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되뇐다. 사이드로 나온 감자튀김이 손가락 마디만큼 두툼하고 양도 푸짐하다. 혼자 먹기 많은 양이지만,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남김없이 먹는다.

식사 후 오랜만에 예쁜 카페에 가고 싶었다. 의자가 편하고 화장실도 깨끗하고 커피도 맛있고 넓고 조용한 카페를 찾아보기 어쩐지 피로했다. 무엇보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면 차가 막힐 시간이다. 그렇게 밥만 먹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아, 정말 익숙하고 나다운 선택이다.

집 근처 핸드드립 카페에 들어서니 점원이 이미 마감했다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이 한낮에, 포털에 안내된 마감시간보다 이르게 마감하다니. 퉁명스러운 말투에 기분이 상한다.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 구석에 자리 잡는다. 커피는 그저 그렇지만 넓고 의자도 편하다. 화장실도 내부에 있고 흡연구역도 갖췄다. 익숙하지만 지긋지긋하지 않은, 훌륭한 카페다.


살면서 할랄가이즈를 사 먹은 건 다섯 번이 넘지 않는다. 할랄가이즈는 지긋지긋할 때 먹는 음식이다. 반수생이던 스무 살, 날마다 야근이던 스물아홉 살. 일상이 지긋지긋해서 견딜 수 없지만 도망칠 수 없을 때 김밥이나 국밥 대신 할랄가이즈를 먹었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관계들과 냉정히 결별할 수 있기를. 나를 지치게 하고, 또 기대하게 하는 모든 것들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기를. 서른 살 겨울에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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