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지우 Dec 24. 2020

달콤한 위로, 밤조림

    영화 ‘리틀포레스트’를 본 사람은 기억에 남는 음식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내게는 그게 밤조림이다.

깊어 가는 가을, 산에서 주운 통통한 알밤을 하나하나 겉껍질만 제거한다. 베이킹소다를 넣은 물에 반나절 정도 담가 두었다가 그대로 30분가량 끓여낸다. 물은 버리고 밤을 씻어 새로운 물에 다시 30분씩 2번을 반복한다. 30분씩 총 3번에 걸쳐 삶아낸 다음 밤 무게의 50~60%의 설탕을 넣고 밤이 잠길 정도의 물을 부은 다음 설탕물이 자작하게 될 때까지 졸여낸다. 열탕 소독한 밀폐 유리병에 알밤과 시럽을 부어 보관하면 두고두고 먹을 수 있는 밤조림이 완성된다.


    현실은 냉혹한 편이다. 일단 남의 사유지에서 밤을 주워 가는 것은 불법이다. 내 소유의 산이거나 내 마당에 심은 밤나무가 아닌 이상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고요한 산에서 밤을 줍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매하는 것이 가장 간편하다. 하지만 마트에서 구매하는 밤은 복불복인 경우가 있다. 나의 첫 시도는 불복이었다. 마트에서 구매한 밤 한 봉지는 까면서 절반, 그리고 삶으면서 나머지 절반을 버렸고, 이때 나는 태어나서 봐온 애벌레보다 더 많은 애벌레를 그것도 무척 가까운 곳에서 보았다. 처음에는 비명을 지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차츰 ‘밤이 정말 맛있는 음식이구나. 이렇게 많은 손님들이 다녀가신 걸 보면…’하고 해탈하게 되었다. 하지만 밤 한 봉지에서 겨우 살아남은 게 단 3알이라니… 손질하느라 까매진 손과 뻐근한 어깨, 오랜 조리시간이 아까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두 번째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시골에는 간혹 할머니들이 직접 재배한 농작물을 빨간 대야에 담아 길가에서 판매하는 경우가 있다. 여러 유통과정에서 다양한 (벌레) 손님들이 다녀간 것보다는 생산자와 직거래하는 게 훨씬 신선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눈여겨보았던 할머니에게 밤 한 바구니를 구매했다. 역시나 싱싱한 밤이었다. 활기 넘치는 애벌레 몇 마리 발견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밤이 싱싱하고 알이 굵었다. 껍질을 까고, 불리고, 삶고, 조리는 과정을 거쳐 두 병의 밤조림이 완성되었다. 숙성을 시켜서 먹으면 더 깊고 풍미가 짙다는데, 궁금한 마음에 그 자리에서 몇 알을 집어먹었다. 밤의 고소함과 부드러운 식감, 달콤한 시럽이 주는 행복감...

    영화 속 주인공은 단풍 든 조용한 가을산에서 엄마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밤을 주워 온다. 조리 과정은 편집 상 빠르고 간단하고 벌레도 없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하지만 완성된 밤조림을 한 알씩 먹으며 느끼는 달콤한 충족감만은 같았으리라. 오늘 아침도 우리집은 쌉쌀한 커피와 함께 밤조림을 하나씩 먹는 것으로 시작했다. 밤조림이 주는 달콤함이 오늘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도록.

작가의 이전글 크리스마스 '츄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