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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Mar 18. 2024

하코비 데마에 그리고 헤어짐

지난주 처음으로 호스트가 되어 <하코비데마에>를 하게 되었다.

늘 1:1로 밀착하여 알려주는 준코짱에 의하면 하코부에서 파생된 다도 명칭이다.

 * 하코부 :  はこぶ [運ぶ] : 운반하다, 옮기다, 나르다.


입장 전, 미즈야


준비하는 장소인 미즈야에서 간식부터 물을 버리는 퇴수기까지 모든 다구를 하나씩 가지고 입장하고, 손님께 인사하고, 차를 대접하고, 다시 퇴장하는 것까지 한 바퀴 돌아봤다. 수업을 몇 번 안 해본 것 같은데 벌써 처음 홀로 해야 한다니. 이럴 때 딱 맞는 표현이 여기 있다. '나는 누구? 지금 여긴 어디?' 아아아 그냥 드러눕고 싶었다.


입장할 땐 오른발 먼저. 퇴장할 땐 왼발 먼저. 나중엔 내 발인지 네 발인지도 모르겠다.
다다미 선 밟지 않기. 대부분 다다미 한 칸당 세발자국만에 걷기.
단, 퇴수기를 들고 입장할 땐 다섯 걸음 만에 살짝 오른쪽 대각선으로 앉기.
물통은 다다미 16번째 줄 한가운데에 두기.
차완과 나츠메를 들고 들어올 땐 겨드랑이 간격을 두고 팔은 둥글게 하여 나츠메를 살짝 높이 들기.
퇴수기는 벽에서부터 다다미 5-7번째 줄에 내려놓으며, 퇴수기 중앙이 병풍 끝부분과 일치하게 두기.
나츠메와 차센은 가마의 모서리와 물통을 선으로 쭉 이었을 때 가상의 선상에 두기.
히샤쿠를 잡을 땐 중앙 마디를 건들지 말기.
가마의 물을 뜨기 위해 히샤쿠를 잡을 땐 검지와 중지를 사용해서 잡기.
물통에서 물을 뜨기 위해 잡을 땐 손등을 위로 하고 손가락 전체를 사용하여 잡기.
대나무 끝을 손바닥 두툼한 손에 안정감 있게 기대어 잡고, 전체 모양은 팔과 쭉 직선이 되도록 유지하기.
히샤쿠 받침은 가마 우측하단 다다미 세 칸 간격으로 위치.
히샤쿠를 가마에 걸칠 때는 손잡이 끝부분이 가마 일직선상을 벗어나지 않게 주의.


무릎 끓고 앉은자리 반경 1m 이내에 보이지 않는 선들이 있고 그 연장선상 정확한 위치에 모든 다구들이 위치해야 한다. 규칙이 있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일본어다. 왁! 너무 당연한 거지만 다시 한번.. 으아아아! 내 아무리 올해의 큰 타이틀 하나를 Go out of my comfort zone!으로 정했다만, 정말 너무 디스콤포또! (discomfort) 한 거 아닙니까. 외국인을 위한 차수업을 기대했지만 모두 일본인들뿐. 으하 느무 어렵다.


나는 일본어를 대학생 때 남편이 '아는 오빠'이던 그 시절에 그에게 3개월 정도 배운 게 다이다. 아 진짜 기초는 어학원에서 1달 배웠던 듯. 연인이 되고 나서는 무슨 일본어 수업이냐. 그저 동서남북으로 쏘다니며 데이트하기 바빴다. 그때 잘 배웠어야 했는데... 모든 것에는 때가 있거늘... 이제 내 뇌는 한국어도 벅차단 말이다. 엉엉.


일본어는 고사하고 선생님께 다도 순서를 다 까먹는 게 너무 걱정된다고 했더니 원래 누구나 다 그런 것이라고 늘 새로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 다시 차수업이 있는 오늘 아침. 꼭 시험날 아침처럼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고 가기 전부터 너무 떨렸다. 미룰 수만 있다면 미루고 싶은 마음. 하지만 오늘 제가 빠지면 연습자가 1명뿐이거든요. 그리고 오늘 수업을 다 마치고 나와서 카페에 앉아 글을 쓰는 지금은 머리가 아프다. 오늘은 두 번이나 내가 호스트 역할을 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무릎 꿇고 있었나 보다. 눈을 감아도 눈앞에 다구가 펼쳐진다.


근데 역시 한편으로 재미가 있으니 또 가는 것이겠지. 사실 최근 딸아이의 교우관계 문제로 답답하던 참이었다. (딸엄마는 늘 이 고민은 디폴트일 듯) 어쨌든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라 어찌할 방법은 없고 그저 기도하고 응원해 주는 게 해줄 수 있는 것의 전부였는데 어느새 그 문제는 살짝 뒤로 밀렸다.

'다도 순서를 까먹지 말아야 할 텐데...'


이렇게 세세한 규칙들은 자칫 과해 보이기도 하고 답답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 틀을 잘 익히고 따라 하기만 하면 안전하고 편안할 수 있다는 점이 늘 내게는 매력포인트다. 어제는 '화산' 관련 다큐멘터리를 가족과 함께 보며 규슈지방의 초등학생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전교생이 늘 등교 때 헬멧을 쓰고 다니는 장면과 교실 복도에 헬멧이 일렬로 놓여있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PD가 6학년 아이들에게 '실제로 돌이 날아온 적 있냐, 불편하지 않냐' 물으니 '돌이 날아온적도 없고, 불편하긴 하지만 안전을 위해 매일 챙기고 다닌다'면서 '학교와 집에서 이렇게 하도록 배운 것'이라고 답했다. 맞다. 정해진 것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아 편안하여라. 자유분방하게 이리저리 널 뛰는 것보다 적당한 틀 안에서 머무는 것을 좋아하는 내 성향과 잘 맞는다. 다만 그 과정이 초보자로서, 외국인으로서 조금 어려울 뿐이지.




근데 여태 밀착하여 가르쳐준 미야코상과 준코상이 각각 타이완과 도쿄로 떠난다고 한다. 영어를 할 수 있어 늘 의지하던 선생님과 보조선생님이었는데... 이젠 난 누구에게 기댑니까 엉엉. 그냥 Comfort zone에 머물겠다고 할걸 그랬어. 주재원 특성상 늘 만남과 헤어짐이 다반사지만, 헤어짐의 타격감은 줄질 않네.

영어로 날 지켜주던 보호막이 한 꺼풀 벗겨진 느낌이다. 일본어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하나보다. 어떤 길로 인도될 진 모르겠지만... 미야코 상의 말대로 Keep it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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