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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Oct 17. 2021

나는 엄마에 한해서 한없이 나태했다.

엄마는 파를 싫어한다


엄마에 대해 최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엄마는 파를 싫어한다, 그리고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


가족이라는 끈으로 묶여 삼십년이 넘게 서로를 알아왔지만 알고보면 서로가 서로를 넘지 못하게 하는 선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

그런데 그게 당연한 거였다. '엄마라는 타이틀' 또한 엄마의 하나의 부캐에 불과할 뿐인걸.

늘 엄마를 집과 동일시하며 집에 귀속시켰던 건 나와 가족이었지 엄마 당신이 아니었다.


엄마는 파를 싫어하는 걸 처음 언제 알았더라. 아마 엄마와의 첫 해외여행이었던 일본에서였을 것이다.

오사카의 한 야키소바 집에 들어가서 젓가락을 파를 하나하나 건져내던 모습을 보고 엄마 뭐해? 라고 물었더니,

엄마는 파 싫어해.

도대체 언제부터?

엄마와 편식이라니.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는 조합이기도 했지만 그걸 그동안 몰랐단 것이 더 놀라웠다. 의식하고 보니 엄마의 음식엔 늘 파가 없거나 적었고, 엄마는 파를 먹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 엄마와 여행을 다니면서 알게 된 취향도 있다. 엄마가 별 다섯개짜리 리조트에 머무는 것보다 구불대는 미로같은 골목길을 더 흥미로워 한다는 사실이다.

엄마는 베트남에서 내가 매일 무심코 지나쳤던 집들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감탄하고 신기해하는 모습이었고, 필리핀에서 스노클링의 스도 모르는 내가 개인 장비를 챙겨가지 않아 지저분한 공용 장비로 스노클리을 해야 했을 때도 그 날 본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일본의 작은 비즈니스 호텔도 좋아했다. 작지만 침대도 TV도 욕조마저 다 들어간 알찬 콤팩트함에 감탄했다. 엄마의 첫 해외여행이거니 우리 둘이서만 함께 하는 여행이기도 해서 마음만 잔뜩 앞서 일정을 빽빽하게 세워왔다. 하나라도 더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가지런한 오사카의 도로들을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오면 발가락 사이마다 물집이 가득 나 있었다. 그 와 중 길도 많이 잃었다. 우에노역에서 교토로 가는 환승 기차를 찾지 못해 맥도널드 주변을 30분이 넘도록 맴돌고, 교토에서도 길을 잃어 자주 어딘지 모르는 곳에 도착하기도 했지만 엄마는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겨우 물어 찾아갔지만 결국은 잘못된 파가 잔뜩 올려진 꼬치집조차 엄마에겐 모든 게 여행인 것 같았다.

엄마는 늘 여행 중 하루의 마지막을 그 작은 욕조에서 풀었다. 그리고 하루의 시작은 늘 달달한 믹스커피로 시작했다.

오늘은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을 것인지 나의 아침 브리핑을 듣는 엄마는 커피를 마시며 늘 군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엄마가 이 여행을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내 방랑의 피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노력해야 하는 사람도, 맞춰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그런 것들이 엄마에 비유될 정도로 나는 엄마에 한해서 한없이 나태했다. 엄마는 노력해야 하는 사람도, 맞춰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엄마가 단지 엄마가 아니라는 것 또한 망각했다.

아늑한 아침을 가르는 알람 소리처럼 가끔 엄마가 아닌 엄마가 일상에 훅 들어오는 때가 있다.

엄마가 할머니와 전화 통화를 할 때 엄마도 참, 이라며 투정을 부렸다. 엄마의 목소리였지만 영락없는 딸의 목소리였다. 어제보다 오늘 하루치만큼 더 늙었다는 것을 새삼 자각한 것처럼 그렇지, 엄마는 할머니의 딸이구나 싶었다.

한 번은 고등학교 때 장롱 깊은 곳을 뒤지다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해 때, 엄마는 다짜고짜 화를 내며 일기장을 빼앗아 갔다. 엄마가 무엇에 화가 났는지 당시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에야 그게 부끄러움이었단 걸 알았다. 그 시절엔 엄마도 부끄러움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었다. 그래서 느닷없이 화를 내는 엄마에게 나도 화를 냈었다. 엄마는 소녀였던 시절을 내게 내보이는 게 부끄러웠던 것일까.


언제나 강하고 반듯하던 엄마도 세월을 못 이기는 것인지 자꾸만 물렁해지는 게 느껴졌다. 가끔 그 물렁함 사이로 내가 모르던 엄마가 불쑥 새어 나온다. 대학 합격을 하고도 돈이 없어 대학을 포기한 이야기, 엄마의 남자 친구였던 이, 엄마가 기르던 고양이, 엄마의 엄마였던 할머니 이야기.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은 엄마가 아니다. 엄마가 그저 오로지 할머니의 딸이었던, 엄마가 소녀이자 여자였던 엄마의 이야기들이었다.


엄마가 낯설게 느껴지면 그 낯섦을 반갑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엄마의 키, 몸무게, 혈액형, 엄마의 신발 사이즈, 엄마가 좋아하는 믹스커피 브랜드, 엄마가 OK 할 만한 영화 종류들, 엄마가 나물을 무칠 때 남들 모르게 넣는 조미료들이 정리된 순서라든가, 빨래를 개는 방식, 고기의 핏물을 빼지 않고 소고기 뭇국을 끓이는 방법, 내가 모르는 것 이 외 전부의 엄마를 알고 있었다. 나와 가족이 빼곡히 채워진 엄마만을.

가족의 공백, 그 시간을 엄마는 무엇으로 채웠을까.

청소, 장보기, 요리 이외에 누구와 무엇으로 하루를 채우는지 가족들 중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늘 뭐 했어? 퇴근을 한 남편이 종종 물어온다.

그 물음에 나는 오늘은 아이가 뭐를 먹었고, 어떤 귀여운 짓을 해서 내 심장을 내려앉게 했는지, 무엇으로 나를 화나게 했는지, 어제보다 어떤 새로움이 늘었는지를 종알종알 얘기한다.

그래서 너는 뭐했어? 남편은 되묻지 않는다.

아이가 선명해진 만큼 나는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투명해졌다. 이것도 엄마라면 자연스러운 일일까.


가끔 엄마에게 그저 친한 사람에게 하듯 묻는다.

그리고 엄마가 낯설게 느껴지면 그 낯섦을 반갑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엄마는 오늘 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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