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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Jan 12. 2022

눈이 쌓인 날, 내 아이에게

눈이 쌓인 날, 내 아이에게.


새벽녘에 눈이 왔던 건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창문 너머 보도블록에 소복이 쌓인 눈이 보였어.

차의 엔진은 얼지 않았을까. 차가 막히진 않을까. 오늘 오후엔 얼마나 추울까. 원래라면 자연스레 유지되어야만 하는 생활의 리듬에 균열이 생길까 하는 자잘한 걱정들이 먼저 와야 하는데 이젠 얼른 너를 깨워서 눈을 보여주고 싶더라고. 그래, 네가 있어서.

지난 달만 해도 창문 너머로 내리는 눈을 보며 엄마 먼지예요,라고 했던 너였는데 이제는 눈 내린다는 소리에 자다가도 번쩍 일어나다니 네가 자라는 속도가 이따금 피부로 와닿듯 실감이 나.

언젠간 너도 금새 까맣게 녹아 아스팔트 위에서 흐물거리는 눈의 미래를 먼저 떠올릴 때가 올 텐데 말이야. 그게 언제가 되었든 하루라도 더 늦춰지길 기도하면서 나는 벌써 눈의 미래를 떠올리고 있지 뭐야.

길을 나서고 사람들이 밟지 않는 눈 위만을 쫓다 우연히 눈 위에 찍힌 작은 동물의 발자국을 발견했어.

맞아. 네 말대로 고양이 발자국일지도 몰라. 같이 그 발자국을 쫓아가느라 우리도 모르게 최대 속도를 내버렸지 뭐야.

어느새 도착한 어린이집 앞에서 유독 들어가지 않겠다는 너를 달래면서 그냥 집으로 같이 돌아갈까, 망설이다 일찍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으로 결국 너를 어린이집에 돌아넣고 오는데 계속 집에 간다고 조르던 네가 어린이집에 들어서자마자 돌아서서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는데 그게 왜 그렇게 마음을 울렸는지 몰라.

체념 같은 무기력한 감정들은 네가 늦게 배우길 바라면서 너에게 제일 먼저 가르친 게 마치 그것같단 생각에 너를 다시 품에 넣고 싶더라. 너는 매일 내게 사소함으로도 넘칠 듯한 행복을 가르쳐주는데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는 건 체념이나 기다림뿐인 것 같아서.


가끔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르는 원망도 들어. 너는 이렇게 온전히 너를 담아 나를 채워주는데 너로만 가득 차지 못 하는 내가 잘못된 것 같아서 말야.

온전한 너와 온전한 내가 공존할 수 없는 게 내 부족함인지, 엄마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시간의 맥락인지, 너와 내가 속해 있는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인지. 명확한 답이 없는 문제에서 나는 어딘지 허물어지고 그런 너는 나를 메꿔주기 바쁘고 그런 네게 매일 미안해하는 하루가 쌓여가는 기분이야.

그래도 아가야. 나는 정말로 널 사랑해. 많이나, 죽을만큼이냐, 조금씩, 더와 같은 형용사가 필요없을 정도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표현할 수 있는 그 순수함으로 널 사랑해.

그래, 그 말이면 충분할 정도로 널 사랑해. 아가야. 너를 정말 사랑해. 그저 네게 매일 해주고 싶은 말은 이거야.

오늘은 너와 함께 눈을 보았지. 그 눈 사이에서 작은 고양이 발자국을 발견했고 우린 그 발자국을 쫓느라 젠걸음으로 전속력으로 걸었어.

그래, 이런 하루들이 매일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게, 너와 함께 이런 시간들을 쌓아갈 수 있다는 게 그게 다인걸.


2022년 1월 11일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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