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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나 Oct 16. 2023

11 파도

15


하나의 감정은 거대한 파도와도 같아서 한 번 휩쓸리고 나면 그 외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한다. 예감을 했든 아니든 일단 거대한 물보라에 몸이 떠내려 가는 순간 모든 생물이 갖고 있는 생존 본능만이 살아남을 뿐이었다.

그건 김수정이 여섯 살 때의 일이라고 했다. 어떤 경위로 물속에 빠지게 된 건지 알 수 없지만 김미주의 말로는 순식간이었다고 했다. 정말 눈 한번 깜박했는데 네가 눈앞에서 사라져 있지 뭐야.

목구멍으로 넘어오던 따끔한 락스물과 소독약 냄새,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닿을 것 같지 않던 깊은 심연이 감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거스르지 못하는 강한 힘에 대한 공포만이 김수정의 기억에 깨진 유리조각처럼 남아 있었다. 다행히 그 일로 물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트라우마를 얻게 된 것은 아니었다. 물속에서 여유 있게 떠 있는 사람들과 달리 물을 흠뻑 머금은 곰인형처럼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 허우적댈 뿐이었다. 김수정은 더 이상 물을 즐길 수 없었다. 거대한 태풍이 지나가고 남은 자리에 남은 것이 고작 그뿐이니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중에 김미주의 말을 듣고 기억을 맞추어 보고 김수정이 놀랐던 건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구조대원이 와 김수정을 건져 내 마른 수건으로 돌돌 말아 엄마에게 데려다준 모든 일이 10분도 체 안 됐다는 것이었다. 30분은 넘게 물속에서 발을 굴린 것처럼 저려 왔는데. 물을 1리터는 넘게 마신 것 같이 목이 아팠었는데. 김수정이 생사를 넘나든 시간이 고작 그 짧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김수정은 그때의 짧지만 영원 같던 시간으로 되돌아 간 기분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완벽한 어둠뿐이 없었다. 이곳은 침범해서는 안 될 영역. 금기를 어긴 쾌락. 탐욕. 공포. 설렘. 낯섦. 정의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심장이 피부를 뚫고 나올 정도로 크게 뛰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이 실제인지 꿈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김수정이 느끼고 있다는 그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김수정의 눈앞에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 아니, 거대한 블랙홀은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김수정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게 엑스다. 저게 곧, 내가 될 것이다. 우리이다.

거대한 구멍은 주변의 어둠마저 모조리 흡수해 버리고 순식간 아니 어쩌면 아주 느린 속도로 김수정을 통과했다. 동시에 김수정이 세계를 집어삼켰다. 김수정은 자신의 내부가 가득 차면서 팽창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설명될 수 없고 오로지 체험될 수만 있었다. 빅뱅 이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직관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나니 천장에 미세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수정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천장을 뜯었다. 마치 알을 깨고 나가는 새처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손으로 찢기 시작했다. 김수정이 분열되어 여기저기 널린 의식 속 자신을 찾았을 때 누군가의 부름이 들려왔다.


“수정아!”


김수정이 마인드 박스에 들어갔다 온 순간은 영원 같았는데 현실의 시간은 그 절반에도 못 미쳤다.


16


교실은 정말 이상한 공간이었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비슷한 옷과 비슷한 관심사, 하지만 교실 안에서 평등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교실은 왕이 존재하는 봉건사회가 되기도 했으며 때론 사회가 정한 법과 질서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글이 되기도 했다. 교실이 그리운 사람들은 교실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뿐이었다. 어른들은 종종 학창 시절이 그립다는 말을 흘리곤 했다. 김수정은 그런 어른들에게 학교 얘기를 잘하지 않았다. 해봐야 너 때는 감수성이 예민해서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으로 자신도 겪어 온 시절이라고 무심하게 하나로 뭉뚱그리는 태도는 오히려 김수정을 상처 입히기도 했다. 

어른들은 교실을 하나의 작은 사회라고 불렀다. 어쨌든 사람으로 태어난 인상 혼자 살 수는 없는 거고 아이들 간의 상호 작용이나 공동체의 질서를 따르는 것도 학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감히 그 안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말은 맞았다. 사회의 어떤 면을 보든 그것을 축소해 놓았다는 건 맞는 말이었다. 철저하게 불평등한 것은 아니었으나 평등하지 않았다. 무리 안에 끼지 못 하고 배회하는 아이와 외면받는 아이는 늘 존재했다. 무리에서 도태하면 죽는다는 위기의식이 늘 아이들의 무의식 속에 깔려 있었다.


김수정은 이미 작은 사회의 낙오자였다. 김수정이 교실에 들어서자 소란스럽던 교실이 한순간에 조용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는 게 그 증거였다. 그런 순간 김수정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하나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 어떤 상처도 받지 않은 것처럼 굴기. 그것이 김수정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이자 공격이었다. 김수정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문으로 들어서 자리에 앉았다. 주변도 곧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김수정은 창문을 통해 아직 다 푸르러지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야 이거 대박 아니냐.”


점심시간이었다. 큰 소리가 상대를 압도한다 믿고 자신이 다수의 의견을 대표한다는 식으로 목소리를 키우는 아이는 늘 반에 한 명씩 있었다.

세 명의 무리가 일어나 교실 앞에 화면을 띄웠다. 몇 번이나 돌려 본 영상 속의 독수리가 다시 한번 하강하고 있었다. 김수정을 포함해 반에서 그 영상을 공유하지 않은 아이는 한 명도 없을 테지만 모두 여전히 흥미를 잃지 않은 얼굴로 교실 정면에 띄워진 영상을 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뒤통수를 모두 확인하고 나서 김수정은 슬쩍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책장 사이에 쭈그려 앉아 있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곱실거리는 짧은 파마머리가 사방으로 뻗혀 있어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준쿠스였다. 긴 다리를 좁은 틈에 맞게 접어 앉아 있는 지유는 그 공간에 알맞아 보였다.

김수정은 말도 없이 손가락으로 지유의 목덜미를 찍었지만 지유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지유와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만나는 게 약속처럼 되어 버렸다. 일렬로 서 있는 책꽂이마다 십진분류법으로 정리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그 사이에서 김수정과 지유는 보호색을 두른 것처럼 안전해 보였다. 소곤대는 말소리들과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종이가 시간을 머금고 내뿜는 냄새,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로웠다. 김수정이 기억하는 학교의 기억 중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지유와 김수정이 만난 것은 광화문의 한 대형 서점이었다. 서점은 아날로그의 최전선이자 성역처럼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서점 공간의 일부를 가상현실에 내어주고 유통 도서 양의 절반 이상이 전자책으로 대체되었지만 아직도 서점이라는 공간이 주는 감성을 김수정과 같이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점은 학교 아이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지유를 처음 서점에서 본 것을 의외의 일이었다. 김수정은 지유의 얼굴만 알고 있었다. 

종종 우연은 설렘을 만들었다.


“너도 서점 다니니?”


그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서점이라는 공간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끼리의 은밀한 교류를 말하는 것일까, 서점을 다닐 만큼 괴짜라는 말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서점에서 책을 사냐는 말일까. 김수정이 어떤 대답이 정답일까 고민하느라 대답을 미루자 지유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나도 서점 다녀. 좋아해서. 너는?”

“나도. 가끔 와.”


이상해 보일까 봐 뒤에 자주 오지 않는다는 말을 붙였다.


“가끔 오는 거치곤 자주 보이던데? 나 실은 여기서 너 몇 번 봤거든.”


예상치 못 한 사건 발생의 전조를 알리는 북소리가 김수정의 가슴에 울리기 시작했다. 이 작은 곱슬머리 여자 아이의 말을 단순히 호의로 받아들여도 되는지 아직 확신 같은 건 없지만 고립된 여자 아이의 외로움은 쉽게도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두근거렸다.


“뭐 사려고?”

“고민 중.”


지유가 들어 올린 책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의 얼굴이 팝아트 형식으로 박혀 있었다.


“에세이를 좋아하는 거야,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야?”

“이 사람의 인생에 흥미 있는 거야.”


김수정에게 누군가의 인생에 흥미 있다는 말이 또래 애가 할 만한 것이라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니 눈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여자아이가 남달라 보이는 건 당연했다. 


“어… 대단하긴 하지.”

“대단하긴 한데?”

“어?”

“뒷 말이 더 있는 것 같아서.”

“그건 아니고."


망설이다 김수정이 하려던 말을 덧붙였다.


"그 사람은 애초에 우리랑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잖아. 부모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부자고 할리우드에서 태어났고 보고 자란 환경이 일반 사람들이랑 다를 텐데, 그런 괴짜인 성격도 어느 정도 주변에서 용인해 줘야 가능한 게 아닐까.”


지유가 오랜 시간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자 김수정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이 아이에겐 미움받고 싶지 않은데. 김수정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지유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수도 있겠다. 이 사람이 그저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타고난 배경도 엄청나긴 해. 그래도 난 대단한 건 대단하다고 생각해.”

“어떤 점이?”

“그냥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든 누구나 가진 걸 잃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같을 수도 있잖아. 그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이렇게 말하면서 지유는 덧붙였다.


“그래도 네 말이 정말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사람들은 달라도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변 사람이 자신과 다르다는 걸 알아채면 거리를 두기 마련이거든. 근데 이 사람 주변엔 정말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자신을 쉽게 드러낼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 나도 해 본 적 있어.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가정하는 건 아무 소용없겠지만 말이야.”


말을 마친 지유는 김수정의 옆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보아 온 그저 교실을 채우고 있던 아이들과 이 아이는 달라. 

지유는 모든 점에서 경이로웠다. 지유가 하는 모든 말들은 놀라웠다. 지유가 하는 모든 행동들이 우아하게 보였다. 그저 매일을 버티는 사람에게 숨 쉴 구멍 하나가 주는 위안과 해방감은 상상도 못 할 정도라 김수정은 그날부터 지유에게 정신없이 빠져 들었다.

그날 이후 김수정은 버틴다는 느낌에서 조금은 살고 있다는 생기를 갖기 시작했다. 아마 그 사람 주변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더라도 소용없었을 거라는 말,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을 전하진 않았지만 지유도 분명 알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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