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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리브래드슈 May 18. 2021

당근이세요?

당근과 당근 사이


오늘은 봄맞이 대청소날이다.

요즘 왠지 내년에는 쓸 것만 같아서 쟁여두었던 물건들을 판매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판매할 물건을 예쁘게 사진 찍고 나면 가장 어려운 시간이 찾아온다. 가격 결정의 시간. 내 물건이라는 이유로 한 번 밖에 안 쓴 물건은 정가를 받아도 될 것만 같고, 닳고 닳은 물건도 내 추억이 담겨 소중함의 가격을 더해 더 비싸게만 팔고 싶은데 당근들은 냉정하다. 웬만큼 싸게 올려서는 좋아요 하나도 받기 힘들다.


오늘은 정말 눈물을 머금고 떨이 가격으로 물건을 올렸다. 이건 말도 안 되는 가격이라는 생각을 하며 올렸지만 연락이 없는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몇 천 원 내려본다. 그리고 당근이 울리기만을 기다려 본다. 제발 더 이상 깎아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 쿨 거래가 이뤄지길 바래본다.


당근은 타이밍이다. 내 물건이 누군가에게 언제 필요하냐의 문제이다. 지금 당장 안 팔려도 걱정 말자. 한참 전에 올려 둔 물건이 까먹고 있을 때쯤 연락이 온다. 물건을 둘 곳만 있다면 당근에 내 물건을 진열해두고 언젠가 올 손님을 기다리면 된다.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당근을 열고 사무용 책상을 둘러본다. 책상이 저렴하고 이쁜 것이 많아서 여기저기 좋아요를 해두고 관심 목록에서 무엇을 사볼까 고민해본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쇼핑앱을 열고 검색해본다. 요즘 이렇게 싼 책상이 많았다니! 아까 봤던 그 책상이 새 상품 가격이랑 별 차이 안나잖어! 그 가격에 샀으면 큰일 날뻔했네~ 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내가 산 가격보다 싼 가격에 파는 상품을 만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이 어딨는가. 이 가격이면 새 상품을 구매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쿨하게 카드를 긁는다. 깨끗하게 쓰고 다시 당근에 팔면 되니까.


아들 책은 어릴 때는 물고 빨고 하니 깨끗한 새책으로 사줬는데 이제 한두 살도 아니고 다섯 살이니 당근에서 사줄만한 책이 있을까 둘러본다. 상태도 좋고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책이 있어서 일단 톡을 보내본다. 그리고 밑져야 본전이니 깎아달라고 흥정도 해본다. 정가 주고 사기 아까웠던 물건이 있다면 일단 키워드 알림을 걸어두고 대어가 낚이길 기다려본다.  


당근은 타이밍이다. 키워드 알림이 울리면 잽싸게 들어가서 낚아 채야한다. 인기 있는 상품은 빠르게 품절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애매한 상품이라면 좋아요를 누르고 가격이 내려갔다는 알림을 기다리는 인내도 필요하다.




당근과 당근 사이에 판매자와 구매자의 벽이 허물어지는 경우도 있다. 지난 주말 올려둔 책 세트에 '갑작스레 병원에 오느라 아이가 가지고 놀 것이 없다며 책을 사고 싶은데 병원까지 와줄 수 있겠냐'는 당근 톡이 도착했다. 아들 또래라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집에서 아들이 좋아했던 퍼즐과 인형을 찾아 책과 함께 더 가져다주었다. 역시나 엄마 마음과는 달리 그 아이는 책보다는 퍼즐과 인형을 더 좋아했다며 고맙다는 인사가 톡으로 왔다. 그 책들을 다 읽기 전에 건강해져서 어서 퇴원하길 바래본다.







내일, 음감 작가님은 '합리적' 과 '합리화'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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